경북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557
송소< 松巢 > 권< 權 > 우< 宇 >(?∼1573, 선조< 宣祖 >6년< 年 >, 진사< 進士 >, 퇴계문인< 退溪門人 > 광해군사전< 光海君師傳 >, 증통정대부< 贈通政大夫 > 승정원좌승지겸< 承政院左承旨兼 > 경정참찬관< 經정參贊官 >의 제택< 第宅 >이라 전< 傳 >하지만 안대청< 大廳 > 서< 西 >쪽 대들보의 상량기명< 上樑記銘 >에는 순조< 純祖 >24년< 年 >(1824) 개기< 開基 >라 하였으니 송소< 松巢 >의 종손< 宗孫 > 종택< 宗宅 >이라 보아야 할 것 같다. 송소< 松巢 >는 현< 現 > 종손< 宗孫 > 응룡< 應龍 >의 12대조< 代祖 >라 한다.
송소< 松巢 > 권< 權 > 우< 宇 >(?∼1573, 선조< 宣祖 >6년< 年 >, 진사< 進士 >, 퇴계문인< 退溪門人 > 광해군사전< 光海君師傳 >, 증통정대부< 贈通政大夫 > 승정원좌승지겸< 承政院左承旨兼 > 경정참찬관< 經정參贊官 >의 제택< 第宅 >이라 전< 傳 >하지만 안대청< 大廳 > 서< 西 >쪽 대들보의 상량기명< 上樑記銘 >에는 순조< 純祖 >24년< 年 >(1824) 개기< 開基 >라 하였으니 송소< 松巢 >의 종손< 宗孫 > 종택< 宗宅 >이라 보아야 할 것 같다. 송소< 松巢 >는 현< 現 > 종손< 宗孫 > 응룡< 應龍 >의 12대조< 代祖 >라 한다.
집은 전형적< 典型的 >인 재사< 齋舍 >의 형식< 形式 >을 지녔으면서 후산< 後山 >에 사당< 祠堂 >을 지은 것은 이 집이 종가< 宗家 >의 살림집으로 사용< 使用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자형< 一字形 > 안채와 ㄷ자형< 字形 > 아래채가 상< 上 > ·하< 下 >로 마주하여 튼口자형< 字形 >을 이루었으며 동간< 棟間 >의 트인 부분< 部分 >은 담장을 쌓아 마감하였다.
안채의 길이는 5간< 間 >이고 너비는 2간< 間 >이며 대청간< 大廳間 >에도 모두 퇴주< 退柱 >를 세운점은 보기 드문 예< 例 >에 속한다. 동< 東 > ·서< 西 > 양편< 兩便 >은 온돌< 溫突 >방이고 중< 中 > 6간< 間 >은 대청< 大廳 >과 툇마루이다. 동온돌< 東溫突 >은 방을 줄여서 간반< 間半 >으로 하고 반간< 半間 >의 전퇴< 前退 >를 두었다. 대청< 大廳 >의 서< 西 >쪽 대들보에는 「숭정기원후사갑신이월이십이일개기삼월초택일입주동일상량성조< 崇禎紀元後四甲申二月二十二日開基三月初七日立 柱同日上樑成造 >라 묵서< 墨書 >하였다. 이 상량문< 上樑文 >으로서 이 집의 창건< 創建 >은 송소< 松巢 >의 재세년대< 在世年代 >와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재사형< 齋舍形 >집을 종가< 宗家 >로 사용하는 경우는 각별한 계기와 규범상< 規範上 >의 문제를 수반할 것이라는 점에서 구명< 究明 >될 의미< 意味 >가 있을 것이다. 아래채도 길이가 5간< 間 >이며 여기에 고패로 2간반< 間半 >이 더 있는 통집이다. 온돌< 溫突 >방과 부엌, 고방< 庫房 >, 마구간, 대문< 大門 > 등을 갖추었으며 그 배치형식< 配置形式 >이 역시 재사< 齋舍 >의 그것과 같다.
마구간이 대문< 大門 >옆외에 안마당에 또 간반< 間半 >이 들여진 것은 마구간이 안으로 가장 깊숙히 들어선 예< 例 >가 될 것이다. 대문< 大門 > 왼편 2간< 間 >의 부엌에는 “들마루 ”1좌< 坐 >가 있는데 이것도 드문 예< 例 >에 속할 것이며 찬마루로 쓰였을 것이다.
이 집에는 지금 “이계재사도록< 伊溪齋舍都錄 > ”이 전래< 傳來 >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종택< 宗宅 >이라 불리기 전< 前 >에는 원명< 原名 >이 “이계재사< 伊溪齋舍 > ”였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재하< 齋下 > 동중< 洞中 >에는 “이계서당< 伊溪書堂 > ”이라 게액< 揭額 >된 종중서당< 宗中書堂 >이 있는데 원래< 元來 > 이계서숙< 伊溪書塾 >은 부< 父 > 대기씨< 大器氏 >가 창건< 創建 >한 것이므로 그 이후< 以後 >로는 줄곳 지명< 地名 >인 이계< 伊溪 >라 관용< 慣用 >되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서당< 書堂 >은 길이가 4간< 間 >, 너비가 2간< 間 >이며 일자< 一字 > 동향< 東向 >집이다. 중< 中 > 4간< 間 >이 청< 廳 >이고 양단< 兩端 >은 각< 各 >2간< 間 >씩의 온돌< 溫突 >방이며 홑처마 팔작< 八作 >집이다. 생각컨대 이계서당< 伊溪書堂 > 창건당시< 創建當時 >에는 그 정침< 正寢 >이 촌중< 村中 >에 있었고 지금의 종택< 宗宅 >인 재사< 齋舍 >는 후건< 後建 >(순조< 純祖 >24년< 年 >)된 것으로서 촌중< 村中 > 정침< 正寢 >의 기능이 어느 시기< 時期 >에 끊겨 종택< 宗宅 >이 재사< 齋舍 >로 이동< 移動 >한 것이 아닐런지 추측< 推測 >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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