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 초량동
정발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무과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감을 거쳐 북변 종성에 여진족의 침구가 있어 원수의 막하로 부임하여 구란을 평정하였다. 그뒤 거제현령을 지내고 들어와 비변사의 낭요(郎僚)가 되어 팔사의 낭관을 겸하고 있다가 위원군수로 제수되기도 했다. 강섬의 천거로 훈련원 부정(副正)이 되고 다시 사복시로 옮겼다. 이때부터 왜인이 침략할 기미가 보였는지 조정에서는 드디어 그를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올려 부산진첨사로 삼았으니 이 해가 바로 임진왜란 발발해인 1592년이었다.
임진 4월 13일 저녁 왜적의 제1군 18,700명이 부산앞바다에 쇄도하였다. 13일 당일에는 적군은 절영도 전방에서 가박하고 공격은 개시하지 않았다. 다만 왜군의 장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막료인 대마도 주(主)인 종의지(宗義智)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부산진성의 경비상황을 정탐하고는 휘하 장수인 평조신(平調信)을 시켜, 군의 내침의 사유를 말하고는 길을 빌리는 가도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쓴 것을 성밖에 세웠다고 한다. 이때 정발은 가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리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세를 공고히 하였다.
이튿날 14일 적은 예측한대로 부산포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안에 붙여 차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적군은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절대다수의 병력을 가진 적군은 신무기인 조총을 마구 발사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성을 넘어오려고 하였다. 이에 아군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4면에서 혈전을 벌였다. 총탄이 터지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리 순식간에 처절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정발은 휘하의 장사를 거느리고 성내를 순시하며 독전하였다.
그렇지만 군, 성민은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모두 죽게된다는 마음으로 분전을 계속하였다. 정발은 이미 예측한 일이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무인답게 죽을 각오를 하고 더욱 사졸을 격려하며 자신도 분전하였다. 그러나 노도와도 같이 밀어닥쳤던 적군의 일부 군사들이 북쪽의 허술한 곳을 넘어 쳐들어왔다. 따라서 순식간에 성중(城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피아쌍방 육박전이 전개되고 적의 무차별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정발도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파상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의 수는 늘기만 했으며 소수 군민의 필사적인 저항으로는 이를 막을 도리가 없었고 차례로 순사하며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마침내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사한 이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자는 적은데 순사한 애향, 용월은 정공단에 합사하고 있다. 영조 37년(1761) 좌수사 박재하가 공의 전망비를 세웠으며, 영존 42년(1766)첨사 이광국이 정공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내리어 충장공(忠壯公)이라 하고 좌찬성을 증하였다.
[대중교통]
● 지하철
지하철 1호선 초량역 하차
● 시내버스
103번, 88-1번, 88번, 87번, 28번, 22번, 190번 이용, 부산역 하차
정발의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무과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해남현감을 거쳐 북변 종성에 여진족의 침구가 있어 원수의 막하로 부임하여 구란을 평정하였다. 그뒤 거제현령을 지내고 들어와 비변사의 낭요(郎僚)가 되어 팔사의 낭관을 겸하고 있다가 위원군수로 제수되기도 했다. 강섬의 천거로 훈련원 부정(副正)이 되고 다시 사복시로 옮겼다. 이때부터 왜인이 침략할 기미가 보였는지 조정에서는 드디어 그를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올려 부산진첨사로 삼았으니 이 해가 바로 임진왜란 발발해인 1592년이었다.
부산으로 부임할 때 아들과 동행하였다. 왜인의 침입이 예상되어 아들을 억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자 하였다. 아들은 남아있기를 간청하니 "너는 돌아가서 내 어머니와 할머니를 봉양하라"면서 종자를 시켜 떠나도록 하였다. 한편, 남행하고 있던 조방장 이정헌을 막빈으로 초빙하여 부산진성의 방위를 함께 의논하였다.
임진 4월 13일 저녁 왜적의 제1군 18,700명이 부산앞바다에 쇄도하였다. 13일 당일에는 적군은 절영도 전방에서 가박하고 공격은 개시하지 않았다. 다만 왜군의 장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막료인 대마도 주(主)인 종의지(宗義智)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부산진성의 경비상황을 정탐하고는 휘하 장수인 평조신(平調信)을 시켜, 군의 내침의 사유를 말하고는 길을 빌리는 가도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쓴 것을 성밖에 세웠다고 한다. 이때 정발은 가도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그리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세를 공고히 하였다.
이튿날 14일 적은 예측한대로 부산포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진하고는 배를 포안에 붙여 차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적군은 성을 첩첩으로 포위하였다. 절대다수의 병력을 가진 적군은 신무기인 조총을 마구 발사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성을 넘어오려고 하였다. 이에 아군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4면에서 혈전을 벌였다. 총탄이 터지는 소리 화살이 나는 소리 순식간에 처절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정발은 휘하의 장사를 거느리고 성내를 순시하며 독전하였다.
그렇지만 군, 성민은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모두 죽게된다는 마음으로 분전을 계속하였다. 정발은 이미 예측한 일이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무인답게 죽을 각오를 하고 더욱 사졸을 격려하며 자신도 분전하였다. 그러나 노도와도 같이 밀어닥쳤던 적군의 일부 군사들이 북쪽의 허술한 곳을 넘어 쳐들어왔다. 따라서 순식간에 성중(城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피아쌍방 육박전이 전개되고 적의 무차별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정발도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파상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적의 수는 늘기만 했으며 소수 군민의 필사적인 저항으로는 이를 막을 도리가 없었고 차례로 순사하며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마침내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사한 이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자는 적은데 순사한 애향, 용월은 정공단에 합사하고 있다. 영조 37년(1761) 좌수사 박재하가 공의 전망비를 세웠으며, 영존 42년(1766)첨사 이광국이 정공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내리어 충장공(忠壯公)이라 하고 좌찬성을 증하였다.
[대중교통]
● 지하철
지하철 1호선 초량역 하차
● 시내버스
103번, 88-1번, 88번, 87번, 28번, 22번, 190번 이용, 부산역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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