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안동(安東)의 옛 지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영가(永嘉)이다.
안동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고창군(古昌君, 古昌郡)으로 개명된 후 고려 태조 13년(930년) 후삼국의 쟁패기에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곳 병산(甁山)전투에서 이 지역 호족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의 노력으로 견훤(甄萱)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움으로 안동부로 승격되었다가 영가군으로 개칭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안동의 향토지를 일러 '영가지<永嘉誌>'라 하고 안동출신 인사들의 모임을 '영가회'라 이름붙일 정도로 이 고장 사람들은 특히 '영가'라는 옛 지명을 쓰기 좋아한다.
영가의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나 영가의 아랫쪽에 터를 닦은 하회(河回)나 모두 낙동강의 흐름이 산세와 조화를 이룬 가운데 형성된 안동의 두드러진 문화적 지표들이다.
조선의 인물 반이 영남에서 나고 영남의 인물 반이 안동에서 났다고 할 정도로 인물이 많이나서 '인다안동(人多安東)', '사부향(士父鄕)안동'으로 일컬어 진다. 공민왕 글씨로 알려진 '안동웅부(安東雄府)'라는 현판은 아직도 안동시청 제3별관에 그대로 걸려있다.
'안동양반'이라는 관용어가 성립될 정도로 유순한 반촌과 문벌이 많기로도 이름이 나 있다.
사부향의 문화적 기반을 조성하고 성리학의 체계를 발전시켜 영남학파를 형성한 계기는 동방의 주자(朱子)로 일컬어지는 퇴계(退溪)에서부터 비롯되며 그 공간적 거점은 도산서원의 모체가 된 도산서당에서 마련된다.
퇴계는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받아들이되 이(理)는 기(氣)가 활동하는 뿌리가 되고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라고 함으로써 주리론(主理論)에 입각한 사상체계를 세운다.
퇴계의 사상체계는 그 문도들에 의해 계승되고 안동권역 일대 사림(士林)들의 학문적 토대 구실을 하면서 주리론을 중심으로 '영남학파'를 성립시키게 된다. 퇴계문도인 서애(西厓)의 병산(甁山)서원과 학봉(鶴峰)의 호계(虎溪)서원이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학파의 중요한 인맥과 학맥의 장징이 되고 있다. 퇴계문도들은 약 300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영남출신은 190명 정도를 헤아린다.
안동은 성리학의 고장이자 또한 민속의 고장이기도 하다.
안동 동채싸움과 놋다리 밟기는 전통적인 남녀 집단민속 놀이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을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구송(口誦)되고 있는 성주풀이 무가(巫歌)를 들어보면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레라'고 하여 안동이 성주신앙의 본향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하회별신굿을 비롯하여 수동별신굿, 병산(甁山)별신굿, 마령(馬嶺)별신굿 등 농촌별신굿과 탈춤의 유산을 두루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국적인 명산(名産)으로 알려져 있는 안동포와 안동소주, 안동식혜 그리고 각 마을마다 산재해 있는 고가옥(古家屋)들이 독창적인 형태들을 지니고 있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많다.
이런 사실로 보아 일상적인 살림살이인 의식주문화 역시 다른 고장에 비해 상당히 두드러진 개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이 동에서 흘러 서쪽에서 다시 북쪽으로 구비쳐 마을을 안고 돌아 흘러 하회(河回)라고 불리어왔고, '물도리동'이라고도 불리어 왔다.
하회(河廻), 곡강(曲江), 하상(河上), 강촌(江村), 하외(河畏), 하촌(河村)등으로도 불리워지기도 했고,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시에 나오는 '청강일곡포촌류(淸江一曲抱村流)'를 줄여서 표현한 눈에 선한 마을 물도리동 하회의 자연경관은 영가로 이름난 안동 낙동강의 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겸암과 서애가 남긴 성리학의 업적과 동성반촌으로서 확보하고 있는 문벌의 위세는 사부향 안동의 명성과 퇴계의 학맥을 이어받아 형성된 것이다.
하회탈과 별신굿의 민속문화는 민속의 고장 안동의 전통속에서 생성 전승된 것이라 하겠다.
하회를 답사하기 이전에 이러한 안동의 문화적 전통을 먼저 들여다 보면 하회마을이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안동(安東)의 옛 지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영가(永嘉)이다.
안동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고창군(古昌君, 古昌郡)으로 개명된 후 고려 태조 13년(930년) 후삼국의 쟁패기에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곳 병산(甁山)전투에서 이 지역 호족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의 노력으로 견훤(甄萱)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움으로 안동부로 승격되었다가 영가군으로 개칭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안동의 향토지를 일러 '영가지<永嘉誌>'라 하고 안동출신 인사들의 모임을 '영가회'라 이름붙일 정도로 이 고장 사람들은 특히 '영가'라는 옛 지명을 쓰기 좋아한다.
영가의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나 영가의 아랫쪽에 터를 닦은 하회(河回)나 모두 낙동강의 흐름이 산세와 조화를 이룬 가운데 형성된 안동의 두드러진 문화적 지표들이다.
조선의 인물 반이 영남에서 나고 영남의 인물 반이 안동에서 났다고 할 정도로 인물이 많이나서 '인다안동(人多安東)', '사부향(士父鄕)안동'으로 일컬어 진다. 공민왕 글씨로 알려진 '안동웅부(安東雄府)'라는 현판은 아직도 안동시청 제3별관에 그대로 걸려있다.
'안동양반'이라는 관용어가 성립될 정도로 유순한 반촌과 문벌이 많기로도 이름이 나 있다.
사부향의 문화적 기반을 조성하고 성리학의 체계를 발전시켜 영남학파를 형성한 계기는 동방의 주자(朱子)로 일컬어지는 퇴계(退溪)에서부터 비롯되며 그 공간적 거점은 도산서원의 모체가 된 도산서당에서 마련된다.
퇴계는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받아들이되 이(理)는 기(氣)가 활동하는 뿌리가 되고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라고 함으로써 주리론(主理論)에 입각한 사상체계를 세운다.
퇴계의 사상체계는 그 문도들에 의해 계승되고 안동권역 일대 사림(士林)들의 학문적 토대 구실을 하면서 주리론을 중심으로 '영남학파'를 성립시키게 된다. 퇴계문도인 서애(西厓)의 병산(甁山)서원과 학봉(鶴峰)의 호계(虎溪)서원이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학파의 중요한 인맥과 학맥의 장징이 되고 있다. 퇴계문도들은 약 300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영남출신은 190명 정도를 헤아린다.
안동은 성리학의 고장이자 또한 민속의 고장이기도 하다.
안동 동채싸움과 놋다리 밟기는 전통적인 남녀 집단민속 놀이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을뿐 아니라 전국에 걸쳐 구송(口誦)되고 있는 성주풀이 무가(巫歌)를 들어보면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레라'고 하여 안동이 성주신앙의 본향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하회별신굿을 비롯하여 수동별신굿, 병산(甁山)별신굿, 마령(馬嶺)별신굿 등 농촌별신굿과 탈춤의 유산을 두루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국적인 명산(名産)으로 알려져 있는 안동포와 안동소주, 안동식혜 그리고 각 마을마다 산재해 있는 고가옥(古家屋)들이 독창적인 형태들을 지니고 있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많다.
이런 사실로 보아 일상적인 살림살이인 의식주문화 역시 다른 고장에 비해 상당히 두드러진 개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이 동에서 흘러 서쪽에서 다시 북쪽으로 구비쳐 마을을 안고 돌아 흘러 하회(河回)라고 불리어왔고, '물도리동'이라고도 불리어 왔다.
하회(河廻), 곡강(曲江), 하상(河上), 강촌(江村), 하외(河畏), 하촌(河村)등으로도 불리워지기도 했고,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시에 나오는 '청강일곡포촌류(淸江一曲抱村流)'를 줄여서 표현한 눈에 선한 마을 물도리동 하회의 자연경관은 영가로 이름난 안동 낙동강의 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겸암과 서애가 남긴 성리학의 업적과 동성반촌으로서 확보하고 있는 문벌의 위세는 사부향 안동의 명성과 퇴계의 학맥을 이어받아 형성된 것이다.
하회탈과 별신굿의 민속문화는 민속의 고장 안동의 전통속에서 생성 전승된 것이라 하겠다.
하회를 답사하기 이전에 이러한 안동의 문화적 전통을 먼저 들여다 보면 하회마을이 친근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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