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하회탈은 넓은 의미로 하회탈과 병산탈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허도령은 삼십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다 한다. 집안이 가난함은 물론 엄격한 부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는데 우연히 이웃집 처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장가들지 못하고 번민하던 중 꿈에 집안에 금줄을 치고 신이 계시한 열 두 개의 탈을 완성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날부터 성심성의껏 탈제작에 임했다.
그 일에 몰두한 지 수 개월 만에 열 한 개의 탈을 제작하고 열 두 개째인 이매탈을 제작할 찰라에 허도령을 사모하던 안씨 처녀가 궁금한 나머지 어느날 밤 담을 넘어 문구멍으로 그 광경을 들여다보자 이상하게도 허도령은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하회탈에 전설이 명료할 리가 없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마을에 전염병이 만연했다. 백약이 무효한 형편이라 성황님을 누구나 찾았다. 18세기 초인 숙종 연간에도 괴질로 2만 명이 죽었고 18세기 후반인 영조 때도 2만 명이 죽은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하루는 지성껏 기도하던 허도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탈 12개를 만들어 자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전염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허도령은 즉시 산 속 계견불문처(鷄犬不聞處)에 움막을 짓고 탈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련이 닥쳤다. 평소 허도령을 사모하던 처녀가 있었고 그 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문을 열고 말았다. 그 뒤의 결과는 동일하다.
그래서인지 현존하는 열 두 개의 탈 가운데 이매탈만 턱이 없고 총각과 떡다리 별채탈 등 세 개는 분실되었고 나머지 아홉 개만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봉산탈 등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탈들이 오백년 미만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형미도 세계 제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존하는 우리나라 탈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는 영애를 안았다. 또한 턱이 움직이므로 인해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국보로의 지정은 하회탈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1964년 3월 30일에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하회탈.
당초에는 신당에 신성하게 보관했을 것이나 언제부터인지는 마을로 그것을 가져왔다고 한다.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는 계기가 된 것은 이 탈들이 마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 학자가 우연히 이 탈을 보고는 세계 제일이라고 격찬한 데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문화재 당국에서 이 탈을 검사하기 위해 서울로 가져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물론 한 장의 영수증도 없이 말이다. 외국인 학자가 이 탈을 볼 당시 탈들은 마을 입구에 있었던 간이 의용소방대 창고 안에 있었다고 한다.
확실한 제작 연도나 제작자 그리고 그 명칭에 있어서도 혼란이 있었다. 일반적인 추론인 고려 이래에 허씨 일족에 의해 제작된 것이 그것이다. 1980년 4월 2일 주지탈 2개가 추가 지정되었다. 명칭에 있어서는 병산탈 2개의 경우 작풍(作風)이 하회탈과는 완전히 달라 잠정적으로 갑(甲) 을(乙)로 구분하였다.
1980년에 이르러서야 대감과 양반탈로 지정된 것이 그것이다.
하회탈은 넓은 의미로 하회탈과 병산탈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허도령은 삼십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했다 한다. 집안이 가난함은 물론 엄격한 부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는데 우연히 이웃집 처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장가들지 못하고 번민하던 중 꿈에 집안에 금줄을 치고 신이 계시한 열 두 개의 탈을 완성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날부터 성심성의껏 탈제작에 임했다.
그 일에 몰두한 지 수 개월 만에 열 한 개의 탈을 제작하고 열 두 개째인 이매탈을 제작할 찰라에 허도령을 사모하던 안씨 처녀가 궁금한 나머지 어느날 밤 담을 넘어 문구멍으로 그 광경을 들여다보자 이상하게도 허도령은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하회탈에 전설이 명료할 리가 없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마을에 전염병이 만연했다. 백약이 무효한 형편이라 성황님을 누구나 찾았다. 18세기 초인 숙종 연간에도 괴질로 2만 명이 죽었고 18세기 후반인 영조 때도 2만 명이 죽은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하루는 지성껏 기도하던 허도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현몽하기를 '탈 12개를 만들어 자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전염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난 허도령은 즉시 산 속 계견불문처(鷄犬不聞處)에 움막을 짓고 탈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련이 닥쳤다. 평소 허도령을 사모하던 처녀가 있었고 그 기한을 지키지 못하고 문을 열고 말았다. 그 뒤의 결과는 동일하다.
그래서인지 현존하는 열 두 개의 탈 가운데 이매탈만 턱이 없고 총각과 떡다리 별채탈 등 세 개는 분실되었고 나머지 아홉 개만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봉산탈 등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탈들이 오백년 미만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형미도 세계 제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존하는 우리나라 탈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는 영애를 안았다. 또한 턱이 움직이므로 인해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국보로의 지정은 하회탈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1964년 3월 30일에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하회탈.
당초에는 신당에 신성하게 보관했을 것이나 언제부터인지는 마을로 그것을 가져왔다고 한다.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는 계기가 된 것은 이 탈들이 마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 학자가 우연히 이 탈을 보고는 세계 제일이라고 격찬한 데서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문화재 당국에서 이 탈을 검사하기 위해 서울로 가져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물론 한 장의 영수증도 없이 말이다. 외국인 학자가 이 탈을 볼 당시 탈들은 마을 입구에 있었던 간이 의용소방대 창고 안에 있었다고 한다.
확실한 제작 연도나 제작자 그리고 그 명칭에 있어서도 혼란이 있었다. 일반적인 추론인 고려 이래에 허씨 일족에 의해 제작된 것이 그것이다. 1980년 4월 2일 주지탈 2개가 추가 지정되었다. 명칭에 있어서는 병산탈 2개의 경우 작풍(作風)이 하회탈과는 완전히 달라 잠정적으로 갑(甲) 을(乙)로 구분하였다.
1980년에 이르러서야 대감과 양반탈로 지정된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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