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우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승(僧) 탄흥이 10년동안 시주를 거두어 선조 19년 (1586)에 완공하였다. 임진왜란 후 은퇴한 선생께서 이곳에서 징비록을 구상,저술하였다.
이곳은 넗은 대(臺)를 이루며 여러채의 집을 지어 앞서 지었던 원지정사나 빈연정사와는 그 큰 규모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동쪽 6칸은 일자대문채를 두었고, 바로 일자형 안채를 동향해서 앉혔다. 안채는 부엌은 한가운데에 두고 그 양편에 방을 두었다. 이지역에 전래하는 민가의 한 기본형인 도투마리집과 규모를 같이 하는점이 주목된다.
구성을 보면 대문, 안채, 사랑채 그리고 별당을 둔 격이 되었으므로 여염 대가집의 배치를 재현한것이다. 사랑채는 4칸 ×2칸반의 제일 규모가 큰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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