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06
집은 위치로 보아서 북촌의 중심에 위치한다. 또한 지금 그 안채가 소실된 남촌댁(南村宅)과 함께 한때 하회전통을 대표할 정도로 유명하다. 99칸 중 현재 54칸이 남아있다. 마을 중심부 북촌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주인 류영하(柳永夏, 74세, 서애 14대손)의 고조인 석호 류도성(石湖 柳道性)공이 1986년(철종 13년)에 경상도 도사를 지내면서 건축한 것으로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7칸의 대문간에 높이 솟은 솟을대문과 왼쪽으로 약간 비켜서 본채의 대문(중문)이 있고 그 좌우에 사랑채 방과 대청이 놓여 있다.
중문 오른쪽에 사랑방 2칸과 대청 1칸이 나란히 있고 안채로 꺾이는 곳에 다시 방 1칸(서고)을 두었다.
중문 왼쪽에는 방 1칸과 마루 1칸을 두었는데 사랑채 전면에는 모두 반칸의 툇마루를 두어 방들과 연결된다.
안채는 사랑방과 대각선에 부엌이 있고 부엌과 사랑채 대청사이에는 모두 광(3칸)으로 들어차 있다. 부엌에서 오른쪽으로 안방 2칸이 좌우로 나란히 붙어 있으며 4칸짜리 대청을 건너 다시 건넌방 2칸(윗 상방)을 두었다.
안채 전면에도 반칸짜리 툇마루를 길게 달았으며 건넌방(윗 상방)에서 퇴를 건너 사랑채 쪽으로 다시 방1칸(아랫 상방)을 두었는데 이것은 별당으로 통하는 중문간과 연결된다.
본채 안마당에서 오른쪽으로 틀면 별당으로 통하는 중문간이 나온다. 별당쪽의 바깥마당 편에 중문이 달려있고 안마당 똑에는 문과 어긋나게 벽을 이루고 있다. 이 중문은 바깥마당과 안마당 또는 별당채와 안채를 이어주는 통로이다. 하지만 중문을 열어 두어도 안마당의 동정이 별당채 또는 바깥마당에서 보이지 않도록 중문간을 ㄹ자 모양으로 설치해 두었다.
사랑채 오른쪽에 빗겨 자리잡은 별당채는 정면에 북촌유거<北村幽居>라는 해서체의 커다란 현판이 걸려있다. 북촌댁이라는 당호와 무관하지 않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집인데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가까운 왼쪽에 넓은 방을 여럿 두고 같은 비중으로 사랑채에 가까운 오른쪽에 대청을 둔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방은 모두 남쪽이고 대청은 북쪽이다. 별당채에 출입하는 외부남성들이 개방된 공간인 대청에 있을 경우 안채와 자연스레 격리될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특히 별당채가 대문채를 향해 조금 틀어 앉은 까닭도 그러한 배려로 보인다.
안채의 뒤뜰은 상당히 넓다 . 감나무와 느티나무 고목들이 있고 그 사이에 채전도 있다.
이 집이 세워진 대가 대원군시절이라고 하니 이 무렵 실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집 주인이 새로운 안목으로 경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집의 구조가 양진당이나 충효당과는 다르게 구성되었음도 그러한 영향에서 볼 수 있다.
사당채는 안채와 별당 사이의 뒷면에 있는 별채이다.
집은 위치로 보아서 북촌의 중심에 위치한다. 또한 지금 그 안채가 소실된 남촌댁(南村宅)과 함께 한때 하회전통을 대표할 정도로 유명하다. 99칸 중 현재 54칸이 남아있다. 마을 중심부 북촌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주인 류영하(柳永夏, 74세, 서애 14대손)의 고조인 석호 류도성(石湖 柳道性)공이 1986년(철종 13년)에 경상도 도사를 지내면서 건축한 것으로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채,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7칸의 대문간에 높이 솟은 솟을대문과 왼쪽으로 약간 비켜서 본채의 대문(중문)이 있고 그 좌우에 사랑채 방과 대청이 놓여 있다.
중문 오른쪽에 사랑방 2칸과 대청 1칸이 나란히 있고 안채로 꺾이는 곳에 다시 방 1칸(서고)을 두었다.
중문 왼쪽에는 방 1칸과 마루 1칸을 두었는데 사랑채 전면에는 모두 반칸의 툇마루를 두어 방들과 연결된다.
안채는 사랑방과 대각선에 부엌이 있고 부엌과 사랑채 대청사이에는 모두 광(3칸)으로 들어차 있다. 부엌에서 오른쪽으로 안방 2칸이 좌우로 나란히 붙어 있으며 4칸짜리 대청을 건너 다시 건넌방 2칸(윗 상방)을 두었다.
안채 전면에도 반칸짜리 툇마루를 길게 달았으며 건넌방(윗 상방)에서 퇴를 건너 사랑채 쪽으로 다시 방1칸(아랫 상방)을 두었는데 이것은 별당으로 통하는 중문간과 연결된다.
본채 안마당에서 오른쪽으로 틀면 별당으로 통하는 중문간이 나온다. 별당쪽의 바깥마당 편에 중문이 달려있고 안마당 똑에는 문과 어긋나게 벽을 이루고 있다. 이 중문은 바깥마당과 안마당 또는 별당채와 안채를 이어주는 통로이다. 하지만 중문을 열어 두어도 안마당의 동정이 별당채 또는 바깥마당에서 보이지 않도록 중문간을 ㄹ자 모양으로 설치해 두었다.
사랑채 오른쪽에 빗겨 자리잡은 별당채는 정면에 북촌유거<北村幽居>라는 해서체의 커다란 현판이 걸려있다. 북촌댁이라는 당호와 무관하지 않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집인데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가까운 왼쪽에 넓은 방을 여럿 두고 같은 비중으로 사랑채에 가까운 오른쪽에 대청을 둔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방은 모두 남쪽이고 대청은 북쪽이다. 별당채에 출입하는 외부남성들이 개방된 공간인 대청에 있을 경우 안채와 자연스레 격리될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특히 별당채가 대문채를 향해 조금 틀어 앉은 까닭도 그러한 배려로 보인다.
안채의 뒤뜰은 상당히 넓다 . 감나무와 느티나무 고목들이 있고 그 사이에 채전도 있다.
이 집이 세워진 대가 대원군시절이라고 하니 이 무렵 실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집 주인이 새로운 안목으로 경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집의 구조가 양진당이나 충효당과는 다르게 구성되었음도 그러한 영향에서 볼 수 있다.
사당채는 안채와 별당 사이의 뒷면에 있는 별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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