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이 사찰은 백제 무왕(600 ~640년 재위)때 행사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고 또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진나라를 거쳐 백제로 올 때 영광에 상륙하여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이 대웅전은 정면 삼간, 측면 삼간, 겹처마인 팔각지붕으로 된 다포계 건물로 매우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판축형으로 화강암을 80cm정도 싸하올려 다듬돌 바른층 쌓기 세벌대의 축조방법으로 되어 있다. 주축은 정평주석방식을 사용했고 기둥은 약한 배흘림을 하고 있다. 두공은 다포계로 외 삼출목, 내 사출목이며 창방위에는 평평한 각재인 평방을 두었다. 주간에는 두구의 포작을 하고 있으며 어간에는 용두로써 주두를 장식하였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묘곡이 완연하며 용마루 중앙에 는 귀면형의 보주를 얹어 한층 장중한 감을 더하고 있다. 내부는 2개의 고주로 대량을 받쳤으며 그 위에 중도리와 용모양의 충량을 걸쳤다. 특이한 것은 좌측에는 3개의 내고주가 가늘한 대 들보를 받치고 있는데 원래는 여기에 불단이 설치도어 있었다고 한다. 우측에는 내고주 없이 굵은 대량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 장은 공포 사이를 순각판이 막고 있으며 층급천장을 하였고 중앙 에 소란이 있는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있다. 귀공포의 한대 끝은 용두로 장식하였으며 불상 위에는 화려한 닷집이 있다. 한편 이 건물에서 가장 특색있는 것은 문살 문양인 바 전면 삼간 공히 삼분각 소슬빗살문으로 중아어간에는 연화문과 국화문을 수 려하게 조각하여 정교한 세공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대웅전의 최후 수리는 융희 3년 기유(1909)에 실시했다는 조선 사찰 사료의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이 건물의 암막새에 「건륭 29년 갑신」이라는 명문이 있는 바 이때는 영조 40년(1764)에 해 당되므로 그 때의 원형이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다면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건물의 원래 구조는 수미단이 서측(향좌)에 있었으며 여기에 본존을 봉안하고 전면이 동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동특에 창소를 개방하도록 설치된 것이다. 이러한 양식은 부석사 무량전 과 같은 예에 속한다. 본존이 서좌동향하는 이러한 유례는 조선조 중기의 희귀한 것이다.
이 사찰은 백제 무왕(600 ~640년 재위)때 행사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고 또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진나라를 거쳐 백제로 올 때 영광에 상륙하여 사찰을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 이 대웅전은 정면 삼간, 측면 삼간, 겹처마인 팔각지붕으로 된 다포계 건물로 매우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판축형으로 화강암을 80cm정도 싸하올려 다듬돌 바른층 쌓기 세벌대의 축조방법으로 되어 있다. 주축은 정평주석방식을 사용했고 기둥은 약한 배흘림을 하고 있다. 두공은 다포계로 외 삼출목, 내 사출목이며 창방위에는 평평한 각재인 평방을 두었다. 주간에는 두구의 포작을 하고 있으며 어간에는 용두로써 주두를 장식하였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묘곡이 완연하며 용마루 중앙에 는 귀면형의 보주를 얹어 한층 장중한 감을 더하고 있다. 내부는 2개의 고주로 대량을 받쳤으며 그 위에 중도리와 용모양의 충량을 걸쳤다. 특이한 것은 좌측에는 3개의 내고주가 가늘한 대 들보를 받치고 있는데 원래는 여기에 불단이 설치도어 있었다고 한다. 우측에는 내고주 없이 굵은 대량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천 장은 공포 사이를 순각판이 막고 있으며 층급천장을 하였고 중앙 에 소란이 있는 우물천장을 설치하고 있다. 귀공포의 한대 끝은 용두로 장식하였으며 불상 위에는 화려한 닷집이 있다. 한편 이 건물에서 가장 특색있는 것은 문살 문양인 바 전면 삼간 공히 삼분각 소슬빗살문으로 중아어간에는 연화문과 국화문을 수 려하게 조각하여 정교한 세공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대웅전의 최후 수리는 융희 3년 기유(1909)에 실시했다는 조선 사찰 사료의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이 건물의 암막새에 「건륭 29년 갑신」이라는 명문이 있는 바 이때는 영조 40년(1764)에 해 당되므로 그 때의 원형이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다면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건물의 원래 구조는 수미단이 서측(향좌)에 있었으며 여기에 본존을 봉안하고 전면이 동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동특에 창소를 개방하도록 설치된 것이다. 이러한 양식은 부석사 무량전 과 같은 예에 속한다. 본존이 서좌동향하는 이러한 유례는 조선조 중기의 희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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