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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석보 - 체성은 구릉기슭의 낮은 평지와 계곡을 성내로 삼고...

by 넥스루비 2007. 8. 7.
울산 북구 정자동 625

유포석보(柳浦石堡)의 축성에 관한 과정은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종 즉위년(1451) 12월에 정분(鄭奔)이 목책을 설치하여 지키자는 것이 맨 처음의 기록이다.
문종 2년 2월에 삼도(三道)체찰사였던 그는 다시 석보(石堡)를 쌓자하여 이것이 받아졌고 단종 1년 8월에 그는 다시 종사관(從事官) 김순우(金淳于)로 하여금 경상도 초군 7500여명으로써 축성하자 하였다.
그러나 단종 1년 9월에 사헌부에서 건의 하기를 흉년으로 민생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이를 정지하자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단종 3년 6월에 경상도 관찰사 황수신(黃守身)이 또 건의하기를 유포에 목책을 설치하였다가 풍년을 기다려 석보를 쌓자한 것이 수용되었다.
또 세조 원년(1455) 6월에는 경상도 관찰사 등이 새로운 성터를 심사 결정하였는데 이때 자리잡은 곳이 지금의 유포석보터인 것이다. 성의 둘레는 1492자였고 가을을 기다려 목책을 설책하자 하였다.
세조 3년 2월에 경상, 전라, 충청도 도체찰사 박강(朴薑) 부사 구치관(具致寬) 등이 유포에는 단시 목책으로 허술한 방위를 하고 있으니 석보를 쌓기로 하되 가을을 기다려 쌓자고 하였다.
이렇게하여 세조 5년에 와서야 석보의 축성을 보게 되었다. 이 성의 방위에는 경주, 울산 등 10개 고을의 은정 3백명을 3번 교대로 지키게 하였는 데 이들의 지휘 통제에는 좌병영의 군관이 맡았으며 좌병영의 지성이나 파견된 소성이라 할 것이다.
이 석보의 둘레를 실측하였는데 이는 755m 2558자였다.


[대중교통]
울산공항에서
[19, 24, 124, 126]번을 타고 [공업탑]에서 하차하여 [6]번을 타고 [아진비취]에서 하차
울산역에서
[102, 305, 314, 317. 327]번을 타고 [공업탑]에서 하차하여 [6]번을 타고 [아진비취]에서 하차
고속.시외버스터미널에서
[112, 23, 29, 315, 333]번을 타고 [공업탑]에서 하차하여 [6]번을 타고 [아진비취]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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