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
당간의 높이 15m이며 지주높이 2.5m, 이 석당간은 조선 헌종(憲宗) 5년(1839)에 중건한 것이다.
장방형의 단층 기단위 중안에 장방형의 1단 굄을 마련하여 당간대좌와 지주를 세웠다. 네모진 돌기둥으로 된 지주는 80㎝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마주 서 있는데 아랫부분은 기단받침대 안에 묻혀있어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당간은 가늘고 긴 팔각 돌기둥 3개를 연결하고 그 위에 원형의 철당간을 올려 마디 표식이 뚜렷하다.
팔각돌기둥의 연결방법은 일반적인 양식으로 위아래 돌의 이어진 부분을 반으로 깍고 중간석의 양 끝을 또 반으로 깎아 서로 밀접시킨 다음 구멍을 뚫고 지름쇠를 건네지르고 쇠테를 둘러 고정시켰다.
당간 위 끝 부분에는 금속제의 둥근 보륜(寶輪)이 얹히고 그 테두리에 풍경과 같은 방울 장식이 달렸는데 현재는 2개가 남아있다.
그리고 맨 꼭대기에는 삼지창(三支槍)과 같은 예리한 철침이 솟아있어 피뢰침으로 추측된다.
특히 이 당간은 당간의 장식적인 유구가 잘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당간의 원형을 보여주는 유일한 문화재이다.
담양읍의 지형이 행주형(行舟型)이라서 배위 돛을 상징하는 짐대를 남원에서 담뱃대 문 장사가 그것을 뽑아다 이곳에 꽂았다는 말이 전해온다. 따로 동네에서 제를 지내는 일은 없지만 자식 낳기를 소원하는 여인들이 정초에 음식을 차려두고 정성을 드렸다고 한다.
지금 당간지주와 당간사이의 틈을 회(灰)로 발라 둔 것은 읍내 국진사(鞠進士)가 이곳에 빌어서 아들을 얻고 고마워서 한 것이라 전한다. (1926년 발간, 白雲香徒가 쓴 「尋春巡禮」에서)
이 근처의 옛 지명이 구절리라 하여 절이 9개 있었다고 전하며 그 때문에 돌미륵과 석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한다. 짐대 가까이 오층석탑도 함께 있어 고려시대의 절이 있었을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석당간(石棹)이 세워진 것은 그 해를 자세히 알기는 어려우나 단 이 고을이 성촌(成村)이 되면서부터 설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