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주동문외 석당간(1기) - 동문밖 석당간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나주시 성북동 2-1

이 석당간은 광주에서 나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북쪽의 나주여상고로 들어가는 길가에 서 있다. 이 지역이 원래 나주읍성의 동문밖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명칭을 부여한 듯 하다.당간이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불(佛).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幢)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당간을 받쳐 세우는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그러나 이 유적과 관련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고적조의 기록은 불교적인 의미보다는 나주가 행주형(배모양)이기 때문에 세웠다는 풍수지리적 성격이 더 드러난다. 즉 처음에 주(州)를 설치할 때 술자(術者)가 세웠는데 행주(行舟)의 형세를 표시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동문내(東門內)에 목장(木檣)이 있다는 것이다. 『여지승람』이후의 읍지나『조선 고적도보』는 석장(石檣)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짐대'로 부르기도 한다. 5매의 화강암을 연결하여 세운것으로 지주는 남북으로 전혀 조식(彫飾)이 없어 간결소박하다. 지주의 정상부는 상면(上面)이 평평한데 거의 외면(外面) 가까이에 이르러 원호(圓弧)를 그리면서 외면과 접하는 모(=각(角))을 깎았기 때문에 전후방(前後方)에서 그 곡선(曲線)이 뚜렸하다. 석장(石墻)의 고정은 내면(內面)상단에 간구(杆構)를 세우고 상부에는 옥간석(屋竿石)과 보주(寶珠)를 놓았다. 당간(幢竿)의 연결은 통식(通式)을 따랐는데, 각 석재의 양 끝부분을 세장(細長)하게 깎아서 간주 두께의 절반이 되게하여 그 부분을 서로 결착시켰다. 그리고 그 접착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위하여 상하 두곳에 둥근 구멍을 뚫어 간(杆)을 끼워 밀착시키고 간 끝부분에 쐐기를 박아 놓았다. 간주(杆柱)의 연결부분에는 철제 띠(=철대(鐵帶))를 둘러 견실하게 하였는데 모두 네 곳이다. 이 철띠는 원래 주철로 주조한 무쇠고리였다고 하나 1983년 보수하면서 철판을 둘러 보완하였다. 당시 상부의 8각의 '옥개석(屋蓋石)은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 면은 곡선처리 하였고 전각(轉角)에도 반전(反轉)이 뚜렷하여 경부(經簿)한 고려식(高麗式)의 옥개(屋蓋)형태라 하겠다. 그 위의 보주(寶珠)는 별다른 조식(彫飾)이 없다. 이 석당간(석장 石檣)은 전체가 매우 안전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서 그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의 '설주시(設州時)'세운 석장(石檣)이란 기록 역시 '세전(世傳)으로 표기하고 있어 풍수(風水)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예는 평양, 청주, 무주, 공주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나주(羅州)란 명칭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통일 신라말-고려 초기로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이 이 지역에서 공방전을 할 때 부터이며 목(牧)이 설치된 때는 983년 성종?이다. 한편 조선후기의 나주목 지도에는 석장(石檣)과 함께 목장(木檣)도 나타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마을 노인들은 큰 장사라면 짚고 다닐만 하다고 하여 "장수주렁막대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