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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극락보전 -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라고 불린 조선초기의 불전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무위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AD 617) 원효대사에 의해 당초 관음사로 창건되었다 하나 근거가 없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편에 「무위사는 월출산에 있으며 개운 3년에 승 도선이 창건 했다 無爲寺, 在月出山 開運三年 僧道詵所創).」라 기록되어 있으나 이 또한 개운 3년(AD 946)과 도선이 사망한 년도(AD 898)와 상당한 차이가 생긴다. 개원 3년은 바로 선각대사탑비를 세운 년대와 같다. 그러니 여지승람 기록 당시 무위사 창건 년대를 선각대사 탑비를 세운 년대로 본 것 같으나 무위사의 창건 년대에 명확한 근거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왔던 사실을 경내에 유존하고 있는 건각대사 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져 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 번째 중건인 서기 1555년 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만은 최근(1956년경)에 실시된 보수공사 에서 본존 후벽의 벽화 명문에 [12년 병신3월초에 길화가 이뤄지 다(十二年 丙申三月初吉畵成)]란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성화12년 (서기 1476년)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측정해 왔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屋蓋部) 이상을 해체·보수할때 중앙칸 종 도리 장혀에서 [선덕5년]이란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서기 1430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기둥은 배틀림을 한 원주로 기둥머리는 이출목(二出目)의 공포를 올리고 있다.

또 대들보 위에는 중종보가 있어 대들보 양쪽에 놓인 파연대공 (波蓮台工)으로 받쳐져 이중양(二重樑) 구조로 되었고, 중종보 끝은 대공위에서 중도리를받치고 있다. 이렇게 가구(架構) 구조는 이중량(二重樑) 구조로 되었으나 건물측면을 보면 이중량(二重樑)으로 보이지 않고 두고주(高柱)위에 중종보만이 보인다. 건물의 전면에는 3칸 모두가 4분합(分閤)의 빗살문을 달았으며 측 면에는 정(井)자살문이 달렸다. 또한 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불단 위쪽에는 닷집모양의 보개(寶蓋)를 올리고 단상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는데 가운데 본존불의 눈 은 활안(活眼)으로서 정면에서 보나 측면에서 보나 보는 이의 눈 을 따라다닌다 하여 신묘하며, 특히 법당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당대 인물화가 오도자(吳道子)의 신필이라고 전하다.

무위사에 남아있는 건물은 대부분 1555년(명종 10) 4창할 때 건립된 것인데 이 극락전만큼은 1956년경 수리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뒷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연기문(緣起文)을 통하여 1430년(세종 12)에 건립되었으며 46년 후인 1476년(성종 7)에는 벽화까지 조성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흐튼층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甲石)만을 둘러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배흘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주심포작(柱心包作)을 짜올려서 결구시켰다. 기단을 앞쪽만 높게 쌓고 두 옆면과 뒷면은 땅의 높이 드대로를 이용한 점이 특징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주심포계 맞배지붕, 겹처마이며 고려말기에 곡선재를 많이 쓴데 비해서 직선재를 써서 간결하면서도 짜임새있고 균형미도 있게 꾸며졌다.

불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뒷벽에는 1476년에 조성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측면벽에도 조선초기 작품으로 보이는 벽화들이 있었는데 해체 수리하면서 그대로 뜯어내어 보호각에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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