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사는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었던 고찰로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제 49대 헌강왕(875 - 885)이 동해용을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헌강왕 5년(879) 3월에 임금이 동쪽의 고을에 거동하여 민정을 살필 일이 있었는데 이 때의 일로서 나라는 태평하여 풍우는 4절 순조롭고 풍악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였다. 헌강왕이 하곡에 왔다가 개운포를 구경하고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서 잠시 쉬었는데 돌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어 길을 잃을 정도였다. 이때 임금을 따르던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되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오니 좋은 일을 하면 풀어질 것이라 하였다. 이에 왕은 수행한 신하에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자 안개와 구름이 흩어지고 개이며 동해용왕이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와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었다. 그 아들들 가운데 임금을 따라 서울에 가 왕정을 보살피도록 한 이가 바로 처용랑(處容郞)이며, 이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진 곳은 개운포라 불리게 되었다. 임금이 서울로 돌아와서 청량면 율리의 영축산 동쪽기슭 좋은 터를 골라 용을 위한 절을 세우니 이 절이 망해사인데 일명 신방사라고도 하였다.
이 같은 사화에 따라 유명한 처용가와 처용무가 우리나라에서 지금 한창 연구개발 중에 있으며, 울산공업 축제 때가 되면 매번 헌강왕의 가장행렬을 행하고 있다.
[대중교통]
● 울산역에서
[345]번을 타고 [시경계]에서 하차
헌강왕 5년(879) 3월에 임금이 동쪽의 고을에 거동하여 민정을 살필 일이 있었는데 이 때의 일로서 나라는 태평하여 풍우는 4절 순조롭고 풍악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였다. 헌강왕이 하곡에 왔다가 개운포를 구경하고 돌아가는 길에 물가에서 잠시 쉬었는데 돌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어 길을 잃을 정도였다. 이때 임금을 따르던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되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오니 좋은 일을 하면 풀어질 것이라 하였다. 이에 왕은 수행한 신하에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자 안개와 구름이 흩어지고 개이며 동해용왕이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와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었다. 그 아들들 가운데 임금을 따라 서울에 가 왕정을 보살피도록 한 이가 바로 처용랑(處容郞)이며, 이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진 곳은 개운포라 불리게 되었다. 임금이 서울로 돌아와서 청량면 율리의 영축산 동쪽기슭 좋은 터를 골라 용을 위한 절을 세우니 이 절이 망해사인데 일명 신방사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미상인데, 순조 31년(1831)에 만들어진 울산부 읍지(蔚山府 邑誌)에는 이 절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나 광무 3년(1899) 6월에 간행된 읍지에는 이미 폐사되고 없는 것으로 보아 1831년에서 1899년 사이 (조선시대 후기) 에 절이 없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그 법당이 세워졌던 자리에는 주초석만 정연하게 심어져 남아있고, 법당 뜰 좌우에 보물 173호로 지정된 석조부도 두기가 남아있다. 지금의 절은 1962년 주지 영암(影庵)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한국 불교 태고종에 속한다.
이 같은 사화에 따라 유명한 처용가와 처용무가 우리나라에서 지금 한창 연구개발 중에 있으며, 울산공업 축제 때가 되면 매번 헌강왕의 가장행렬을 행하고 있다.
[대중교통]
● 울산역에서
[345]번을 타고 [시경계]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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