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의 위치는 정동면 풍정리에 있었다고 전해오나 확실하지 않고 다만, 옛날의 고현지가 현 고읍리에 있었던 관계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 향교는 지난 1963년 12월에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83년 8월 6일 지방유형문화재로서 지정된 '전학후묘형'의 소설위 학교다. 조선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향학당으로 경학을 수강하던 것이 효실로, 세종 22년(1440)에 치성제, 동성제, 명륜당 등의 건물을 짓고 수학원 학사서제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후 세종 32년(1450)에 풍화루를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고, 인조 23년(1645)에 다시 현위치에 중창하였다. 중창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부분적인 중수를 거듭하였고 특히, 대성전의 원주 5개는 건물의 항구적인 보존을 위해 기둥 절반을 모두 석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하면 시골에 있는 문묘와 거기에 부속된 옛날의 학교로서 오늘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며, 일명 학관·제관으로도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다.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향교에는 문묘를 중심으로 중국, 우리나라의 선철·선현을 제사하는 동서양무와 동서양제가 있고 강학하는 명륜당과 기타 부속건물로 구성되어있다. 고려 인종 5년(1127) 3월에 '학'을 세워서 널리 '도'를 가르치라는 조서에 기인한 것으로 중간에 쇠미하였다가 고려말에 다시 부흥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교생을 가르치고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촌·목·군·현을 고을마다 1교씩, 이른바 대설위·중설위·소설위 등의 삼등급으로 나뉘어 큰 고을에는 학수, 훈도 각 1명씩, 작은 고을에는 훈도(종9품)만을 두었는데 사천향교는 위에서와 같이 소설위의 향교로서 학생은 30인을 두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으로 되어 서원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여졌고, 1894년(고종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 남아 지금은 문묘를 향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문묘향사와 건물관리를 위하여 도유사·당의 등을 두었으나, 1908년에 도유사를 직원으로 개칭하고 그 후 1947년에 직원을 전교로 다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현재 향교에는 유도회와 모성계가 있다. 문묘향사는 본래 5성을 비롯하여 맹문 10철과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을 향사해왔는데, 1949년 전국 유림도회의 결의로 지금은 5성, 송조 2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만 향사한다. 이 향사는 위에서 말한대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철과 선현을 제사 지내는 의식으로서 석채 또는 석전제라 한다. 석전은 예기에서 나온 말로 석(釋)과 전(奠)을 놓는다 함이니 간단히 채소를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를 뜻한다. 또 석전제는 본래 봄·가을 두 차례의 상정일 즉, 음력 2월 8월의 첫째 정일에 석전을 향사햐였으나, 근래에 와서는 공자의 탄생일인 음력 8월 27일에 한번만 향사하다가 1987년부터 다시 봄·가을로 환원하고 제물로는 고기,과일,떡 등을 올려 향사한다.
사천향교 - 지방의 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 사천향교
당초의 위치는 정동면 풍정리에 있었다고 전해오나 확실하지 않고 다만, 옛날의 고현지가 현 고읍리에 있었던 관계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 향교는 지난 1963년 12월에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83년 8월 6일 지방유형문화재로서 지정된 '전학후묘형'의 소설위 학교다. 조선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향학당으로 경학을 수강하던 것이 효실로, 세종 22년(1440)에 치성제, 동성제, 명륜당 등의 건물을 짓고 수학원 학사서제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후 세종 32년(1450)에 풍화루를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불타고, 인조 23년(1645)에 다시 현위치에 중창하였다. 중창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부분적인 중수를 거듭하였고 특히, 대성전의 원주 5개는 건물의 항구적인 보존을 위해 기둥 절반을 모두 석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하면 시골에 있는 문묘와 거기에 부속된 옛날의 학교로서 오늘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며, 일명 학관·제관으로도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다.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향교에는 문묘를 중심으로 중국, 우리나라의 선철·선현을 제사하는 동서양무와 동서양제가 있고 강학하는 명륜당과 기타 부속건물로 구성되어있다. 고려 인종 5년(1127) 3월에 '학'을 세워서 널리 '도'를 가르치라는 조서에 기인한 것으로 중간에 쇠미하였다가 고려말에 다시 부흥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교생을 가르치고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촌·목·군·현을 고을마다 1교씩, 이른바 대설위·중설위·소설위 등의 삼등급으로 나뉘어 큰 고을에는 학수, 훈도 각 1명씩, 작은 고을에는 훈도(종9품)만을 두었는데 사천향교는 위에서와 같이 소설위의 향교로서 학생은 30인을 두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으로 되어 서원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여졌고, 1894년(고종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 남아 지금은 문묘를 향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문묘향사와 건물관리를 위하여 도유사·당의 등을 두었으나, 1908년에 도유사를 직원으로 개칭하고 그 후 1947년에 직원을 전교로 다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현재 향교에는 유도회와 모성계가 있다. 문묘향사는 본래 5성을 비롯하여 맹문 10철과 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을 향사해왔는데, 1949년 전국 유림도회의 결의로 지금은 5성, 송조 2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만 향사한다. 이 향사는 위에서 말한대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철과 선현을 제사 지내는 의식으로서 석채 또는 석전제라 한다. 석전은 예기에서 나온 말로 석(釋)과 전(奠)을 놓는다 함이니 간단히 채소를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를 뜻한다. 또 석전제는 본래 봄·가을 두 차례의 상정일 즉, 음력 2월 8월의 첫째 정일에 석전을 향사햐였으나, 근래에 와서는 공자의 탄생일인 음력 8월 27일에 한번만 향사하다가 1987년부터 다시 봄·가을로 환원하고 제물로는 고기,과일,떡 등을 올려 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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