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에 있는 이 군총은 선조 30년(1597) 1월에 일어났던 이른바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에 포진하고 있던 왜구를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무덤의 형태는 사방 20간(36㎡)의 방형분묘로서 흔히 '당병무덤'이라 일컬었으며, 속칭 '댕강무데기'라고도 한다. 이무덤만은 약 400년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또 1985년 11월 14일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조명군총>이라 명칭하여 보호되고 있다. 조명군총의 유래를 살펴 볼 것 같으면 1592년(선조 25) 임진 4월 우리나라를 침약한 일본은 강화교섭을 3년이나 끌다가 결렬되자, 1597년 1월 일본군이 우리나를 재침하여 북진하려다 육지에서는 9월 6일 직산 근방 소사전투에서, 해상에서는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패하여 북진과 서진계획이 저지되자 전국에 일대 전환이 왔다. 그리하여 일군은 서둘러 경상도 남해안지방으로 퇴각하여 동쪽으로 울산에서 부터 서쪽으로 순천에 이르는 800여리 연해에 성을 쌓거나 수축하여 포진하였다. 이때 사천지방에는 그해 12월 선진에 왜군이 상륙하여 성을 수축, 이듬해(1598) 진을 쳤는데, 명나라 동정군의 중로제숙 동일원과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약 3만여 병력으로 9월 19일부터 진주에서 남강을 건너 망진채, 영춘채, 곤양성을 차례로 빼앗고 사천구성(읍성)의 적을 크게 무찌른 후 10월 초하루에는 선진의 신채를 다그쳐 왜적을 바다로 몰아내려다 치열한 격전이 벌여졌다. 이때에 아군진중의 폭약고에 발생한 불의의 화재로 적의 역습을 받게되어 아군은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이때 분사한 전사자의 수급을 적의 손으로 장사한 곳이 이 무덤인 것이다. 적은 이 전투에서 38,717명의 목을 베었다고 공칭하였으며, 성 밖에다 사방 20간 되는 땅을 파서 수급을 묻고 큰 무덤을 만들어서 군승이 장례를 집행한 후 '경관'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수한 수급의 코와 귀를 베어 큰 나무통 10개에 넣고 소금에 절인 후 전공공물로 본국에 보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측의 <선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전사한 당군의 수는 7∼8천명에 이른다고 하여, 3만명 이상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승자 쪽에서는 전과를 크게 과장하려고, 반대로 패자 쪽에서는 그 피해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하는 것이 예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38,717명대 7∼8천명이라는 큰 차이는 과장이라도 이만저만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당시 약 3만명인 동일원 휘하의 조·명연합군의 총병력 보다도 많다는 점에서 믿기 어려운 숫자인 것이다. 당시 왜군이 전공공물로 코와 귀를 잘라 보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은 전투한 뒤 또는 분탕질할 때 가능하면 죽은 사람의 코와 귀를 잘라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측 기록의 38,717명 가운데 10월 1일 전투에서 명군전사자 외에도 그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명군과 조선군 및 이러한 전쟁통에 억울하게 죽은 일반 양민,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자행해 온 왜군의 분탕질로 무참히 학살당한 인근 지방의 양민들의 숫자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이 무덤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관심밖에 방치되어 너무 소홀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당병무덤이란 이름과 같이 명군전사자의 수급이 많이 묻혀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무덤이 비록 명군전사자들의 수급이 많이 묻혀 있다 하더라도 왜침을 당한 우리나라의 국난을 구하기 위해 원군으로 파병되어 왜적을 몰아내려다 이국 땅에서 목숨 바친 원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우리들은 높이 받들어야 하겠다.
조명군총 - 정유재란때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조명군총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에 있는 이 군총은 선조 30년(1597) 1월에 일어났던 이른바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에 포진하고 있던 왜구를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무덤의 형태는 사방 20간(36㎡)의 방형분묘로서 흔히 '당병무덤'이라 일컬었으며, 속칭 '댕강무데기'라고도 한다. 이무덤만은 약 400년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또 1985년 11월 14일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조명군총>이라 명칭하여 보호되고 있다. 조명군총의 유래를 살펴 볼 것 같으면 1592년(선조 25) 임진 4월 우리나라를 침약한 일본은 강화교섭을 3년이나 끌다가 결렬되자, 1597년 1월 일본군이 우리나를 재침하여 북진하려다 육지에서는 9월 6일 직산 근방 소사전투에서, 해상에서는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패하여 북진과 서진계획이 저지되자 전국에 일대 전환이 왔다. 그리하여 일군은 서둘러 경상도 남해안지방으로 퇴각하여 동쪽으로 울산에서 부터 서쪽으로 순천에 이르는 800여리 연해에 성을 쌓거나 수축하여 포진하였다. 이때 사천지방에는 그해 12월 선진에 왜군이 상륙하여 성을 수축, 이듬해(1598) 진을 쳤는데, 명나라 동정군의 중로제숙 동일원과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약 3만여 병력으로 9월 19일부터 진주에서 남강을 건너 망진채, 영춘채, 곤양성을 차례로 빼앗고 사천구성(읍성)의 적을 크게 무찌른 후 10월 초하루에는 선진의 신채를 다그쳐 왜적을 바다로 몰아내려다 치열한 격전이 벌여졌다. 이때에 아군진중의 폭약고에 발생한 불의의 화재로 적의 역습을 받게되어 아군은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이때 분사한 전사자의 수급을 적의 손으로 장사한 곳이 이 무덤인 것이다. 적은 이 전투에서 38,717명의 목을 베었다고 공칭하였으며, 성 밖에다 사방 20간 되는 땅을 파서 수급을 묻고 큰 무덤을 만들어서 군승이 장례를 집행한 후 '경관'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수한 수급의 코와 귀를 베어 큰 나무통 10개에 넣고 소금에 절인 후 전공공물로 본국에 보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측의 <선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전사한 당군의 수는 7∼8천명에 이른다고 하여, 3만명 이상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승자 쪽에서는 전과를 크게 과장하려고, 반대로 패자 쪽에서는 그 피해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하는 것이 예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38,717명대 7∼8천명이라는 큰 차이는 과장이라도 이만저만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당시 약 3만명인 동일원 휘하의 조·명연합군의 총병력 보다도 많다는 점에서 믿기 어려운 숫자인 것이다. 당시 왜군이 전공공물로 코와 귀를 잘라 보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은 전투한 뒤 또는 분탕질할 때 가능하면 죽은 사람의 코와 귀를 잘라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측 기록의 38,717명 가운데 10월 1일 전투에서 명군전사자 외에도 그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명군과 조선군 및 이러한 전쟁통에 억울하게 죽은 일반 양민,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자행해 온 왜군의 분탕질로 무참히 학살당한 인근 지방의 양민들의 숫자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이 무덤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관심밖에 방치되어 너무 소홀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당병무덤이란 이름과 같이 명군전사자의 수급이 많이 묻혀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무덤이 비록 명군전사자들의 수급이 많이 묻혀 있다 하더라도 왜침을 당한 우리나라의 국난을 구하기 위해 원군으로 파병되어 왜적을 몰아내려다 이국 땅에서 목숨 바친 원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고귀한 정신을 우리들은 높이 받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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