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은 조선조 제5대 문종의 아들로 세종 23년(1441)에 태어나서 12살 어린 나이로 부왕 문종에 이어 제6대 왕위에 올랐다.(1452)
그러나 그를 보필하던 김종서·황보인등의 상거들이 그의 숙부 수양대군(뒤에 세조)에게 참 살되자, 1455년 재위 3년만에 왕위를 빼앗기고 어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땅에 유배 되었다가 세조 3년(1457)에 죽임을 당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슬픈 운명의 임금이었다. 한편 이에 앞서 세종대왕은 그의 즉위 23년(1441)에 애손인 단종이 탄생하자 자신의 태실앞 원구상에 애손의 태실을 조영토록하여 그 해에 태실이 안치되었다. 영조 10년(1734)에 세종대왕의 태실비를 세울 때 단종 태실비도 함께 건립하였는데 그 규모는 높이 170cm, 너비 51cm, 두께 21cm이다. 일제 때 이 태실지에 속한 임야 1.2ha도 세종대왕 태실지와 함께 1929년경에 소유권자인 경복궁에 의해 민간에 불하되고 태실은 서울로 옮겨갔다고 한다. 한편 <태실운영기>에 따르면 왕가의 태를 석실에 넣어 산에 묻는 것을 안태라 하고, 안태산을 일명 태봉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이 사무를 맡아 보게 하고 태실도감에서 태를 묻을 땅을 물색하기 위하여 안태사를 보내거나 태를 묻게 하였다.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태를 곧장 백자 항아리에 넣어 산실안에 두었다가 초7일 이내에 길일을 택하여 까다로운 격식의 세태를 한다. 이와같이 깨끗이 씻은 태는 다시 백자 항아리에 담고 또 이보다 조금 큰 항아리에는 당시의 주화인 개원통보를 개원의 자면이 보이도록 깔고 그 위에 태를 넣은 항아리를 넣는다. 그리고 그 대소 항아리 사이 공간도 솜으로 메꾸고 감당단편을 그 위에 놓고 불의 연기로 녹여여서 항아리를 봉하고 다시 밀봉한다. 이러한 안태 풍속에 대하여 <선조개정록>에는 신고조간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태봉에 불이 났다하여 고을의 원이 바뀐 기록이 <중종실록>에 있고, 또한 태봉수호를 게을리 하였다하여 군수를 체포하여 엄하게 다스린 예가 조선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같이 태봉을 왕육 못지않게 중히 여겼으며, 또한 태봉 덕에 현이 군으로 승격되는 것은 당연한 일로 곤명현이 곤남군으로 승격된 것은 좋은 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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