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의 창건과 천불천탑의 건립은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헌상으로 전해진 사료에는 아직까지 이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능성현조에 「운주사재천불산사지좌우산배석불탑각일천, 우유석실이석불상배이좌」이란 기록이 보이고 있어 현존 석불석탑의 유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이곳 운주사는 해발 100m내외의 비교적 낮은 야산지대로 평지와 야산 등 반경 약200m 범위내에 산재되어 있다. 1984년 전남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유적은 석탑 18기, 석불 52구이나 석불에 있어서는 불두만 남아 있는 것이 20여구가 더 수습되었다.
이 조사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주목되는 유물로 높이가 18.8m되는 금동여래입상이다. 도금된 금색은 완전히 퇴색되었으나 나발의 머리와 큼직한 육계가 있는 준수 한 작품으로 고려 초기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불상은 운주사 입구 석불좌대 밑에서 수습되었는데 전남지방에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예라 하겠다.
현 법당 건물은 도암면지에「무오년간(1918) 전 군수 박연동외 16 일 경영」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918년경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지는 1984년 조사시 "홍치팔년명" 암막새 기와와 함께 고려 초기의 해무리굽 청자편, 범자문 수막새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찰경내의 많은 석불 및 석탑은 그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비록 정제된 수법은 아니나 이토록 많은 숫자의 석불석탑이 소장된 사찰은 우리나라에서 그 예가 없다 하겠다.
조성 연대는 고려 시대의 지방적인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예로 보아 고려 중기인 12세기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러한 불사는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고려 중기 이후까지 계속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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