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조선왕실은 세종대왕 탄생을 경하하기 위하여 대왕의 태실을 봉안키로 하고, 태실도감을 설치한 후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을 전국에 내려보내 길지를 찾게 했다고 한다.이들은 전국의 명당지를 누빈 후에 당시 곤명현의 소곡산이 최길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즉위년(1418)에 안태사를 소곡산으로 내려보내 태봉을 조영하였으니 이때가 대왕 탄생 22년이 되는 해이다. 이로 인하여 일개의 소현이 세종대왕의 어태가 안치됨으로 인하여 파격적인 군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폭악무도한 왜적의 도굴로 태실의 설란간, 석주 등이 파손 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4년 뒤인 선조 34년(1601) 3월에 대대적인 복구잡업을 하였으며, 영조 10년(1734)에는 태실비를 건립하였는데 태실비의 규모는 높이가 180cm, 너비 33cm, 두께 27cm이다. 한편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1929년에 태실의 소유권자인 경복궁이 태실임야 9.3ha(2만8천여 평)을 민간인에게 불하하고, 경기도 양주로 이안해 갔으니, 태실 안치후 511년만의 일이다. 현재 태실지에는 민가의 사설묘가 들어서면서 묘성으로 화하고, 당시의 조형유물인 태실비를 비롯한 태항의 중동석·상합연엽석·돌난간·지대석·초석·팔각대 등의 석물이 산자락 에 한데 모아져 지방기념물로 1972년 2월 12일 지정 보호하고 있다.
조선왕실은 세종대왕 탄생을 경하하기 위하여 대왕의 태실을 봉안키로 하고, 태실도감을 설치한 후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을 전국에 내려보내 길지를 찾게 했다고 한다.이들은 전국의 명당지를 누빈 후에 당시 곤명현의 소곡산이 최길지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즉위년(1418)에 안태사를 소곡산으로 내려보내 태봉을 조영하였으니 이때가 대왕 탄생 22년이 되는 해이다. 이로 인하여 일개의 소현이 세종대왕의 어태가 안치됨으로 인하여 파격적인 군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폭악무도한 왜적의 도굴로 태실의 설란간, 석주 등이 파손 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4년 뒤인 선조 34년(1601) 3월에 대대적인 복구잡업을 하였으며, 영조 10년(1734)에는 태실비를 건립하였는데 태실비의 규모는 높이가 180cm, 너비 33cm, 두께 27cm이다. 한편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1929년에 태실의 소유권자인 경복궁이 태실임야 9.3ha(2만8천여 평)을 민간인에게 불하하고, 경기도 양주로 이안해 갔으니, 태실 안치후 511년만의 일이다. 현재 태실지에는 민가의 사설묘가 들어서면서 묘성으로 화하고, 당시의 조형유물인 태실비를 비롯한 태항의 중동석·상합연엽석·돌난간·지대석·초석·팔각대 등의 석물이 산자락 에 한데 모아져 지방기념물로 1972년 2월 12일 지정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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