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98-1
쇄미록< 쇄尾錄 >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 당시< 當時 > 오희문< 吳希文 >이 난< 亂 >을 직접 체험< 體驗 >하면서 기록한 일기< 日記 >로서 선조< 宣祖 >24년< 年 >(1591) 11월< 月 >부터 동왕< 同王 > 34년< 年 >(1601) 2월< 月 >까지 9년< 年 > 3개월간< 個月間 >의 사실< 事實 >을 기록< 記錄 >한 것이다.
저자< 著者 > 오희문< 吳希文 >은 자< 字 >는 비연< 斐然 >, 본관< 本貫 >은 해주< 海州 >, 경민< 景閔 >의 아들, 유학< 儒學 >을 공부하여 문필< 文筆>이 훌륭하고 행실< 行實 >이 돈독< 敦篤 >하며 식견< 識見 >이 해박< 該博 >하였으나 과거< 科擧 >에 급제< 及第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식< 正式 > 관로< 官路 >에는 오르지 못하고 다만 만년< 晩年 >에 아들 윤겸< 允謙 >의 주선< 周旋 >으로 선공감< 繕工監 > 감역< 監役 >을 지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들 윤겸< 允謙 >은 (호< 號 >가 추탄< 楸灘 >) 인조조< 仁祖朝 >에 영의정< 領議政 >을 지냈으며 손자< 孫子 > 달제< 達濟 >는 병자호란< 丙子胡亂 >때 끝까지 척화< 斥和 >를 주장하다 청< 淸 >까지 끌려가 절사< 節死 >한 삼학사< 三學士 >의 한 사람이다. 이 초고< 草稿 > 일기< 日記 >는 총 7책< 冊 >인데, 제< 第 >1책< 冊 >은 임진남행일록< 壬辰南行日錄 >, 임진일록< 壬辰日錄 >, 제< 第 >2책< 冊 > 계사일록< 癸巳日錄 >, 제< 第 >3책< 冊 > 갑오일록< 甲午日錄 >, 제< 第 >4책< 冊 > 을미일록< 乙未日錄 >, 병신일록< 丙申日錄 >, 정유일록< 丁酉日錄 >, 제< 第 >5책< 冊 > 정유일록< 丁酉日錄 >, 제< 第 >6책< 冊 > 정유일록< 丁酉日錄 >, 무술일록< 戊戌日錄 >, 제< 第 >7책< 冊 > 기해일록< 己亥日錄 >, 경자일록< 庚子日錄 >, 신축일록< 辛丑日錄 >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책< 各冊 > 권말< 卷末 >에는 국왕< 國王 >과 세자< 世子 >의 교서< 敎書 >, 의병< 義兵 >의 격문< 檄文 >, 명장< 明將 >의 성명문< 聲明文 >, 통문< 通文 >, 각종< 各種 > 공문서< 公文書 >, 과거방목< 科擧榜目 > 기타< 其他 > 잡문< 雜文 >이 수록< 收錄 >되어 있어서 당시< 當時 >의 사정< 事情 >을 이해< 理解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서명< 書名 >을 쇄미록< 쇄尾錄 >이라고 한 것은「시전< 詩傳 >」의 패풍< 패風 > 모구장< 모丘章 >에 있는「쇄혜미혜< 쇄兮尾兮 > 유리지자< 流離之子 >」라는 구절< 句節 >에서 따온 것으로 유리기< 流離記 > 곧 피난록< 避亂錄 >이란 뜻이며, 이 일기< 日記 > 마지막에 “이후< 以後 >부터의 일기< 日記 >는 용지< 用紙 >도 다하고 또 서울에 다시 돌아와 유리< 流離 >할 때도 아니므로 붓을 그친다 ”고 한 데에서 이 일기< 日記 >의 목적< 目的 >이 피난중< 避亂中 >의 사실< 事實 >을 기록< 記錄 >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쇄미록< 쇄尾錄 >은 임진왜란< 壬辰倭亂 > 당시< 當時 > 오희문< 吳希文 >이 난< 亂 >을 직접 체험< 體驗 >하면서 기록한 일기< 日記 >로서 선조< 宣祖 >24년< 年 >(1591) 11월< 月 >부터 동왕< 同王 > 34년< 年 >(1601) 2월< 月 >까지 9년< 年 > 3개월간< 個月間 >의 사실< 事實 >을 기록< 記錄 >한 것이다.
저자< 著者 > 오희문< 吳希文 >은 자< 字 >는 비연< 斐然 >, 본관< 本貫 >은 해주< 海州 >, 경민< 景閔 >의 아들, 유학< 儒學 >을 공부하여 문필< 文筆>이 훌륭하고 행실< 行實 >이 돈독< 敦篤 >하며 식견< 識見 >이 해박< 該博 >하였으나 과거< 科擧 >에 급제< 及第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식< 正式 > 관로< 官路 >에는 오르지 못하고 다만 만년< 晩年 >에 아들 윤겸< 允謙 >의 주선< 周旋 >으로 선공감< 繕工監 > 감역< 監役 >을 지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들 윤겸< 允謙 >은 (호< 號 >가 추탄< 楸灘 >) 인조조< 仁祖朝 >에 영의정< 領議政 >을 지냈으며 손자< 孫子 > 달제< 達濟 >는 병자호란< 丙子胡亂 >때 끝까지 척화< 斥和 >를 주장하다 청< 淸 >까지 끌려가 절사< 節死 >한 삼학사< 三學士 >의 한 사람이다. 이 초고< 草稿 > 일기< 日記 >는 총 7책< 冊 >인데, 제< 第 >1책< 冊 >은 임진남행일록< 壬辰南行日錄 >, 임진일록< 壬辰日錄 >, 제< 第 >2책< 冊 > 계사일록< 癸巳日錄 >, 제< 第 >3책< 冊 > 갑오일록< 甲午日錄 >, 제< 第 >4책< 冊 > 을미일록< 乙未日錄 >, 병신일록< 丙申日錄 >, 정유일록< 丁酉日錄 >, 제< 第 >5책< 冊 > 정유일록< 丁酉日錄 >, 제< 第 >6책< 冊 > 정유일록< 丁酉日錄 >, 무술일록< 戊戌日錄 >, 제< 第 >7책< 冊 > 기해일록< 己亥日錄 >, 경자일록< 庚子日錄 >, 신축일록< 辛丑日錄 >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책< 各冊 > 권말< 卷末 >에는 국왕< 國王 >과 세자< 世子 >의 교서< 敎書 >, 의병< 義兵 >의 격문< 檄文 >, 명장< 明將 >의 성명문< 聲明文 >, 통문< 通文 >, 각종< 各種 > 공문서< 公文書 >, 과거방목< 科擧榜目 > 기타< 其他 > 잡문< 雜文 >이 수록< 收錄 >되어 있어서 당시< 當時 >의 사정< 事情 >을 이해< 理解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서명< 書名 >을 쇄미록< 쇄尾錄 >이라고 한 것은「시전< 詩傳 >」의 패풍< 패風 > 모구장< 모丘章 >에 있는「쇄혜미혜< 쇄兮尾兮 > 유리지자< 流離之子 >」라는 구절< 句節 >에서 따온 것으로 유리기< 流離記 > 곧 피난록< 避亂錄 >이란 뜻이며, 이 일기< 日記 > 마지막에 “이후< 以後 >부터의 일기< 日記 >는 용지< 用紙 >도 다하고 또 서울에 다시 돌아와 유리< 流離 >할 때도 아니므로 붓을 그친다 ”고 한 데에서 이 일기< 日記 >의 목적< 目的 >이 피난중< 避亂中 >의 사실< 事實 >을 기록< 記錄 >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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