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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부)정조어제선조어서밀찰발외 - 송언신(宋言愼)에게 보낸 어서밀찰(御書密札) 7건(件)을 첩장(帖裝)한 것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여주군 가남면 심석리 산66

본서첩< 本書帖 >은 조선< 朝鮮 > 제< 第 >14대왕< 代王 > 선조< 宣祖 >가, 이조판서< 吏曺判書 > 등을 역임< 歷任 >한 문신< 文臣 > 호봉< 壺峰 > 송언신< 宋言愼 >(1542∼1612)에게 보낸 어서밀찰< 御書密札 > 7건< 件 >을 첩장< 帖裝 >한 것이다.
이 어서밀찰첩< 御書密札帖 >에 대한 정조왕< 正祖王 >의 어친필< 御親筆 > 발문< 跋文 >을 별책< 別冊 >으로 첩장< 帖裝 >하여 도합 2책이 같이 보관되어 있다. 이 선조어찰원첩 < 宣祖御札原帖 >은 호봉< 壺峰 >의 후손가< 後孫家 >에 소장< 所藏 >되어 왔는데, 정조< 正祖 >가 연신< 筵臣 >을 통< 通 >하여 알고는 가져오게 하여 어람< 御覽 >하고 나서, 7건< 件 >에 대한 내용해설< 內容解說 >을 곁들인 친제자필< 親製自筆 >의 발문< 跋文 >을 지어 내리고, 또한 후손가< 後孫家 >가 빈궁< 貧窮 >하여 잘 간직하기 어렵다 하여 호조판서< 戶曺判書 >에게 명하여 원첩< 原帖 >을 개장< 改粧 >해서 궤에 담아 본가에 되돌려 주고 따로 일본< 一本 >을 모사< 模寫 >하여 내각< 內閣 >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어서첩< 御書帖 >은 그때 개장< 改粧 >한 것이다.
정조< 正祖 >의 명< 命 >에 의하여 광주< 廣州 >에 어서각< 御書閣 >이 건립< 建立 >되어 선조어서밀찰< 宣祖御書密札 >과 정조어제어필발< 正祖御製御筆跋 >을 이곳에 보관해 오다가 1970년< 年 > 성남시< 城南市 > 지구개발< 地區開發 >로 그 지역이 수용되면서 현지 주소지인 심석리< 心石里 > 모선재< 慕先齋 >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한다. 송언신< 宋言愼 >의 영정< 影幀 >도 같이 보관되어 있는데 주상찬< 晝像贊 >도 정조< 正祖 >의 친제어필< 親製御筆 >이다. 송언신< 宋言愼 >(중종 37, 1542∼광해 4, 1612)은 선조< 宣祖 > 때의 문신< 文臣 >. 자< 字 >는 과우< 寡尤 >, 호< 號 >는 호봉< 壺峰 >, 본관은 여산< 礪山 >. 류희춘< 柳希春 > ·여수신< 礪守愼 >·이황< 李滉 >의 문하< 門下 >에서 학문을 닦고 명종 때 불교를 배척하고 중 보우< 普雨 >의 처형을 건의하였다. 선조< 宣祖 >10년< 年 >(1577) 문과< 文科 >에 급제< 及第 >, 검열< 檢閱 > ·정언< 正言 >을 지냈다. 1591년< 年 >에 대사간< 大司諫 > ·이조참의< 吏曺參議 > ·도승지< 都承旨 >를 지내고, 1592년< 年 > 평안도 관찰사< 平安道觀察使 >를 거쳐 함경< 咸鏡 > ·강원< 江原 > ·경기관찰사< 京畿觀察使 >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93년< 年 >에서 1599년< 年 >사이 함경도관찰사< 咸鏡道觀察使 >로 재직시< 在職時 > 선조< 宣祖 >가 어찰< 御札 >을 잇달아 내리고 은사< 恩賜 > 또한 많았다. 그 뒤 이조 참판을 거쳐 호조< 戶曺 >를 제외한 나머지 5조< 曺 >의 판서< 判書 >와 좌< 左 > ·우참찬< 右參贊 >을 지냈다. 광해< 光海 > 때에 파면되어 시골에서 죽었다. 시호는 영양< 榮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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