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0-2(경기도박물관 보관)
경기도청< 京畿道聽 > 향토사료관< 鄕土史料館 >에 보관< 保管 >되어 있는 궤장< 궤杖 >은 1669년< 年 > 11월< 月 > 27일< 日 >에 현종< 顯宗 >이 당시< 當時 >의 원로대신< 元老大臣 > 이경석< 李景奭 >에게 내린 하사품< 下賜品 >이다. 조선시대< 朝鮮時代 >에는 70세< 歲 >가 넘으면 국법< 國法 >에 따라 의자와 지팡이 또는 가마 등을 하사< 下賜 >한 습관< 習慣 >이 있었는데 전례< 前例 >에 따라 하사< 下賜 >토록 한 작품< 作品 >이다.
이 유물< 遺物 >들은 전주이씨백헌상공종중< 全州李氏白軒相公宗中 >에서 지금까지 보존< 保存 >하여 상태< 狀態 >가 매우 양호< 良好 >하여, 조선시대< 朝鮮時代 > 중엽< 中葉 > 국가< 國家 >의 공전< 工典 >의 목장< 木匠 >에서 제작규정< 製作規定 >과 양식< 樣式 > 등에 의거< 依據 >하여 제작< 製作 >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朝鮮時代 >의 대표적< 代表的 >인 공예품< 工藝品 >으로 생각된다.
사궤장< 賜궤杖 > 연회도첩< 宴會圖帖 >은 조선< 朝鮮 > 헌종< 顯宗 >9년< 年 >(1668) 11월< 月 > 27일< 日 >에 국왕< 國王 >이 백헌< 白軒 > 이경석< 李景奭 >에게 궤장< 궤杖 >을 내린 축하행사< 祝賀行事 >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연회도< 宴會圖 >이다.
이경석< 李景奭 >(선조< 宣祖 >24년< 年 > : 1591∼현종< 顯宗 >12년< 年 > :1671)은 자< 字 >는 상보< 尙輔 >, 호< 號 >는 백헌< 白軒 >, 본관< 本貫 >은 전주< 全州 >, 덕천군< 德泉君 >후생< 厚生 >(정종< 定宗 >의 10자< 子 >)의 6대손< 代孫 >이다. 1613년< 年 >(광해군< 光海君 >5)에 진사< 進士 >가 되고 1623년< 年 >(인조< 仁祖 >1) 알성문과< 謁聖文科 >에 을과< 乙科 >로 급제, 1626년< 年 >(인조< 仁祖 >4) 문과< 文科 > 중시< 重試 >에 장원< 壯元 >한 후 사가독서< 賜暇讀書 >하고, 1636년< 年 >(인조< 仁祖 >14) 병자호란< 丙子胡亂 >때 청나라에 굴복하자 대제학< 大提學 >으로 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 >을 찬진< 撰進 >하였다. 그 뒤 우의정< 右議政 > 좌의정< 左議政 >을 역임하고 1659년< 年 >(효종< 孝宗 >10)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事 >가 되어 기로소< 耆老所 >에 들어갔다. 1668년< 年 >(현종< 顯宗 >9) 궤장< 궤杖 >을 하사< 下賜 >받았다. 시호< 諡號 >는 문충< 文忠 >이다. 문장< 文章 >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 著書 >로는 백헌집< 白軒集 >이 전한다. 이 연회도< 宴會圖 >에는 지영궤장도< 祗迎궤杖圖 >, 선독교서도< 宣讀敎書圖 > 내외선온도< 內外宣온圖 >가 채색< 彩色 >되어있다. 즉 궁중< 宮中 >의 악원< 樂員 >들이 파견< 派遣 >되어 취주< 吹奏 >하는 장면< 場面 >과 궁중의식< 宮中儀式 >을 받은 유사< 有司 >가 예< 禮 >를 갖추어 궤장< 궤杖 >을 받들고 사택< 私宅 >에 도착< 到着 >하여 궤장< 궤杖 >을 전달하고 교서< 敎書 >를 낭독하는 장면< 場面 >, 왕< 王 >이 하사< 下賜 >한 어주< 御酒 >, 어찬< 御饌 >과 악원< 樂員 >이 참여하여 취주< 吹奏 >하는 가운데 축연< 祝宴 >이 진행되는 모습 등이다. 그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使 > 이경석< 李景奭 > 사궤장교서< 賜궤杖敎書 >와 정태화< 鄭太和 >, 정치화< 鄭致和 >, 송시열< 宋時烈 >, 김좌명< 金佐明 >, 조형< 趙珩 > 박장원< 朴長遠 >, 조부양< 趙復陽 >, 민정중< 閔鼎重 >, 서필원< 徐必遠 >, 남용익< 南龍翼 > 송광연< 宋光淵 > 등< 等 >이 지은 사궤장연< 賜궤杖宴 >의 서문< 序文 >, 경축문< 敬祝文 >, 연시< 宴詩 >와 당사자인 이경석< 李景奭 >의 감사문< 感謝文 >이 수록< 收錄 >되어 있다. 조선시대< 朝鮮時代 >에는 상신< 相臣 >으로 치< 齒 >와 덕< 德 >이 함께 높은 자는 특히 궤장< 궤杖 >을 내려 편안토록 하였다. 이는 기구< 耆舊 >를 우대하고 대신< 大臣 >을 공경하는 뜻이다. 벼슬이 정승의 위< 位 >에 올랐다고 해도 능히 수< 壽 >를 누린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기로대신< 耆老大臣 >으로 궤장< 궤杖 >을 받는 것도 드물게 있는 성전< 盛典 >이었다. 궤장< 궤杖 >을 내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잔치와 음악< 音樂 >을 내리어 호화롭게 하여 삼공< 三公 >과 육경< 六卿 > 의정부< 議政府 >의 동서벽< 東西壁 > 한성판윤< 漢城判尹 > 예조< 禮曺 >의 참판< 參判 > 참의< 參議 > 및 낭원< 郞員 > 모두 참여하였다. 궤장< 궤杖 > 사여< 賜與 >에 관한 교서< 敎書 >는 예문관< 藝文館>에서 작성< 作成 >하며 주서< 注書 >가 모시고 가서 낭독하고 궤장< 궤杖 >은 공조< 工曺 >에서 제작한다. 승지< 承旨 >가 전달하며 그 익일< 翌日 > 전문< 箋文 >을 올려 사은< 謝恩 >하도록 하였다. 이 연회도첩< 宴會圖帖 >은 글씨는 한사람의 필체< 筆體 >이며 필사자< 筆寫者 >는 나타나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림의 내용은 기재< 記載 >되어 있지 않으나 그 당시< 當時 >의 풍속도< 風俗圖 >로서 회화적인 가치는 크다고 볼 수 있겠다.
경기도청< 京畿道聽 > 향토사료관< 鄕土史料館 >에 보관< 保管 >되어 있는 궤장< 궤杖 >은 1669년< 年 > 11월< 月 > 27일< 日 >에 현종< 顯宗 >이 당시< 當時 >의 원로대신< 元老大臣 > 이경석< 李景奭 >에게 내린 하사품< 下賜品 >이다. 조선시대< 朝鮮時代 >에는 70세< 歲 >가 넘으면 국법< 國法 >에 따라 의자와 지팡이 또는 가마 등을 하사< 下賜 >한 습관< 習慣 >이 있었는데 전례< 前例 >에 따라 하사< 下賜 >토록 한 작품< 作品 >이다.
이 유물< 遺物 >들은 전주이씨백헌상공종중< 全州李氏白軒相公宗中 >에서 지금까지 보존< 保存 >하여 상태< 狀態 >가 매우 양호< 良好 >하여, 조선시대< 朝鮮時代 > 중엽< 中葉 > 국가< 國家 >의 공전< 工典 >의 목장< 木匠 >에서 제작규정< 製作規定 >과 양식< 樣式 > 등에 의거< 依據 >하여 제작< 製作 >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朝鮮時代 >의 대표적< 代表的 >인 공예품< 工藝品 >으로 생각된다.
사궤장< 賜궤杖 > 연회도첩< 宴會圖帖 >은 조선< 朝鮮 > 헌종< 顯宗 >9년< 年 >(1668) 11월< 月 > 27일< 日 >에 국왕< 國王 >이 백헌< 白軒 > 이경석< 李景奭 >에게 궤장< 궤杖 >을 내린 축하행사< 祝賀行事 >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연회도< 宴會圖 >이다.
이경석< 李景奭 >(선조< 宣祖 >24년< 年 > : 1591∼현종< 顯宗 >12년< 年 > :1671)은 자< 字 >는 상보< 尙輔 >, 호< 號 >는 백헌< 白軒 >, 본관< 本貫 >은 전주< 全州 >, 덕천군< 德泉君 >후생< 厚生 >(정종< 定宗 >의 10자< 子 >)의 6대손< 代孫 >이다. 1613년< 年 >(광해군< 光海君 >5)에 진사< 進士 >가 되고 1623년< 年 >(인조< 仁祖 >1) 알성문과< 謁聖文科 >에 을과< 乙科 >로 급제, 1626년< 年 >(인조< 仁祖 >4) 문과< 文科 > 중시< 重試 >에 장원< 壯元 >한 후 사가독서< 賜暇讀書 >하고, 1636년< 年 >(인조< 仁祖 >14) 병자호란< 丙子胡亂 >때 청나라에 굴복하자 대제학< 大提學 >으로 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 >을 찬진< 撰進 >하였다. 그 뒤 우의정< 右議政 > 좌의정< 左議政 >을 역임하고 1659년< 年 >(효종< 孝宗 >10)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事 >가 되어 기로소< 耆老所 >에 들어갔다. 1668년< 年 >(현종< 顯宗 >9) 궤장< 궤杖 >을 하사< 下賜 >받았다. 시호< 諡號 >는 문충< 文忠 >이다. 문장< 文章 >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 著書 >로는 백헌집< 白軒集 >이 전한다. 이 연회도< 宴會圖 >에는 지영궤장도< 祗迎궤杖圖 >, 선독교서도< 宣讀敎書圖 > 내외선온도< 內外宣온圖 >가 채색< 彩色 >되어있다. 즉 궁중< 宮中 >의 악원< 樂員 >들이 파견< 派遣 >되어 취주< 吹奏 >하는 장면< 場面 >과 궁중의식< 宮中儀式 >을 받은 유사< 有司 >가 예< 禮 >를 갖추어 궤장< 궤杖 >을 받들고 사택< 私宅 >에 도착< 到着 >하여 궤장< 궤杖 >을 전달하고 교서< 敎書 >를 낭독하는 장면< 場面 >, 왕< 王 >이 하사< 下賜 >한 어주< 御酒 >, 어찬< 御饌 >과 악원< 樂員 >이 참여하여 취주< 吹奏 >하는 가운데 축연< 祝宴 >이 진행되는 모습 등이다. 그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使 > 이경석< 李景奭 > 사궤장교서< 賜궤杖敎書 >와 정태화< 鄭太和 >, 정치화< 鄭致和 >, 송시열< 宋時烈 >, 김좌명< 金佐明 >, 조형< 趙珩 > 박장원< 朴長遠 >, 조부양< 趙復陽 >, 민정중< 閔鼎重 >, 서필원< 徐必遠 >, 남용익< 南龍翼 > 송광연< 宋光淵 > 등< 等 >이 지은 사궤장연< 賜궤杖宴 >의 서문< 序文 >, 경축문< 敬祝文 >, 연시< 宴詩 >와 당사자인 이경석< 李景奭 >의 감사문< 感謝文 >이 수록< 收錄 >되어 있다. 조선시대< 朝鮮時代 >에는 상신< 相臣 >으로 치< 齒 >와 덕< 德 >이 함께 높은 자는 특히 궤장< 궤杖 >을 내려 편안토록 하였다. 이는 기구< 耆舊 >를 우대하고 대신< 大臣 >을 공경하는 뜻이다. 벼슬이 정승의 위< 位 >에 올랐다고 해도 능히 수< 壽 >를 누린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기로대신< 耆老大臣 >으로 궤장< 궤杖 >을 받는 것도 드물게 있는 성전< 盛典 >이었다. 궤장< 궤杖 >을 내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잔치와 음악< 音樂 >을 내리어 호화롭게 하여 삼공< 三公 >과 육경< 六卿 > 의정부< 議政府 >의 동서벽< 東西壁 > 한성판윤< 漢城判尹 > 예조< 禮曺 >의 참판< 參判 > 참의< 參議 > 및 낭원< 郞員 > 모두 참여하였다. 궤장< 궤杖 > 사여< 賜與 >에 관한 교서< 敎書 >는 예문관< 藝文館>에서 작성< 作成 >하며 주서< 注書 >가 모시고 가서 낭독하고 궤장< 궤杖 >은 공조< 工曺 >에서 제작한다. 승지< 承旨 >가 전달하며 그 익일< 翌日 > 전문< 箋文 >을 올려 사은< 謝恩 >하도록 하였다. 이 연회도첩< 宴會圖帖 >은 글씨는 한사람의 필체< 筆體 >이며 필사자< 筆寫者 >는 나타나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그림의 내용은 기재< 記載 >되어 있지 않으나 그 당시< 當時 >의 풍속도< 風俗圖 >로서 회화적인 가치는 크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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