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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양부원군이충원호성공신교서 -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란 점에서 예술적인 가치가 높이평가 되는 교서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여주군 금사면 백자리 147

완양부원군이충원호성공신교서는 두꺼운 선지< 鮮紙 >에 명주< 明紬 >를 접착하여 만든 폭< 幅 >(세로) 36㎝, 길이(가로) 230㎝의 두루마리이다. 전부< 前部 >와 후미< 後尾 >의 공백된 부분을 포함한 길이는 총 298.8㎝인데, 그 중에 전부< 前部 > 36.4㎝, 후미< 後尾 > 22㎝ 가량은 남색< 藍色 >이며 후미< 後尾 >에는 목재< 木材 >로 만든 길이 43.6㎝, 지름 2.4㎝의 축< 軸 >이 있다. 전곽< 全郭 >이 주사난< 朱絲欄 >으로 상하< 上下 >는 34.4㎝이고 매간< 每間 >은 2.5㎝이다. 해서< 楷書 >로 총 60행< 行 >에 걸쳐 묵서< 墨書 >되어 있고 자수< 字數 >는 일정치 않다. 말미< 末尾 > 년< 年 >. 월< 月 >. 일< 日 >위에 정방형< 正方形 >의「시명지보< 施命之寶 >」란 어보< 御寶 >가 찍혀 있다. 배면< 背面 > 우측하부< 右側下部 >에 세로 8.9㎝, 가로 3.4㎝ 크기의 양질저지< 良質楮紙 >를 붙이고 '이정혐< 李廷  >(험)제< 製 >, 한호< 韓濩 > 서< 書 >'라고 두 줄로 병서<  書 >하여, 이 공신교서< 功臣敎書 >의 제진자< 製進者 >와 필사자< 筆寫者 >를 밝히고 있다.
공신교서< 功臣敎書 >는 만력< 萬曆 >32년< 年 > 즉 선조< 宣祖 >37년< 年 >(1604) 10월< 月 >에 국왕< 國王 >이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선조< 宣祖 >의 파천< 播遷 >에 호종< 扈從 >한 호성공신< 扈聖功臣 > 2등< 等 >인 완양부원군< 完陽府院君 > 이충원< 李忠元 >(중종 32년< 年 >, 1537∼선조 38년< 年 >, 1605)에게 내린 교서< 敎書 >이다. 이충원< 李忠元 >의 자< 字 >는 원보< 元甫 >, 호< 號 >는 송암< 松庵 > 또는 여수< 驪  >, 본관< 本貫 >은 전주< 全州 >이며, 덕천군< 德泉君 > 후생< 厚生 >(정종< 定宗수 >의 10자< 子 >)의 현손< 玄孫 >이다.시호< 諡號 >는 충헌< 忠憲 >이며 영정< 影幀 >이 전한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 공신교서< 功臣敎書 >는‘교< 敎 > 충근정량교절협책호성공신< 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 …… 이충원서< 李忠元書 >’란 제하< 題下 >에 대략 5개 문단으로 구성되었다(이런 형태< 形態 >의 교서< 敎書 >는 이미 좌리공신교서< 左理功臣敎書 >(1471)에도 나타나고 있다).
첫째, 공신< 功臣 >의 공적사례< 功績事例 >로 이충원< 李忠元 >의 천품< 天稟 > ·자질< 資質 >과 탁월한 문예< 文藝 >, 역관사실< 歷官事實 >을 서술하고, 다음에 임란< 壬亂 > 때 진충< 盡忠 >하여 국난을 회복한 공을 찬양하고 있다.
둘째, 공신< 功臣 >의 특전< 特典 >으로 호성< 扈聖 >2등< 等 >인 이충원< 李忠元 >에게 내려지는 특전< 特典 > 및 상사< 賞賜 >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상사중< 賞賜中 >‘표리일단< 表裏一段 >’은「선조실록< 宣祖實錄 >」의 상사예규< 賞賜例規 >에는 없는 것으로 규정< 規定 > 이외에 특별< 特別 >히 사급< 賜給 >한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공신< 功臣 >과의 맹서< 盟誓 >로 왕< 王 >이 공신< 功臣 >에게 국가< 國家 >의 존립< 存立 >과 함께 영원히 휴척< 休戚 >을 같이 할 것임을 맹세하고 있다.
넷째, 공신< 功臣 >의 명군< 名單 >으로 1등에 이항복< 李恒福 > 등 2인< 人 >, 2등에 신성군< 信城君 > 후< 珝 > 등 33인< 人 >, 3등에 정탁< 鄭琢 > 등 53인< 人 >, 총89명의 공신명단< 功臣名單 >을 3단으로 적고 있다. 이충원< 李忠元 >은 2등 12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사실증명< 事實證明 >으로‘만력삼십이년십월< 萬曆三十二年十月 > 일< 日 >’이라 하여 반급< 頒給 > 년월< 年月 >을 적고 그 위에 어보< 御寶 >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 평정< 平定 >에 큰 공훈을 세울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 勳號 >는 호성< 扈聖 > ·선무< 宣武 >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조선< 朝鮮 >이 개국한 이래 태조< 太祖 >1년< 年 >(1392)의 개국공신< 開國功臣 >을 비롯하여 공신의 마지막인 영조< 英祖 >4년< 年 >(1728)의 분무공신< 奮武功臣 >에 이르기까지 약 340년간에 무려 28개의 공신이 책록< 策錄 >되었는데, 그 중에 호성< 扈聖 > ·선무< 宣武 > 양공신< 兩功臣 >은 외< 外 >(왜< 倭 >)적< 敵 >을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다른 공신< 功臣 >과는 달리, 오늘까지 특히 중요시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공신교서< 功臣敎書 >는 임란사연구< 壬亂史硏究 >의 사료인 동시에 이충원< 李忠元 >의 전기< 傳記 >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조선전기< 朝鮮前期 > 사대명필< 四大名筆 >의 한 사람인 석봉< 石峯 > 한호< 韓濩 >의 글씨란 점에서 그 예술적인 가치 또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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