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388
안동대학< 安東大學 >에 소장< 所藏 >되어 있는 이 의복< 衣服 >은 안동유림< 安東儒林 >인 부림 홍씨< 洪氏 >의 14대조< 代祖 >되는 홍극가씨< 洪克加氏 >(1670년 졸)< (1670年 卒) >의 수의< 壽衣 >이다. 이는 1974년< 年 > 안동< 安東 >댐의 공사< 工事 > 관계< 關係 >로 이장< 移葬 >하던 중< 中 > 「 미라 」로 출토< 出土 >된 것이다. 의복< 衣服 >은 중치막(창의)< 中致莫(창衣) > 1점< 點 >, 도포< 道袍 > 1점< 1點 >, 바지 1점< 點 >, 버선(말< 襪 >) 1족등< 足等 > 계< 計 > 4점< 點 >인데, 이 가운데 바지는 가랭이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는 박물관< 博物館 > 팀이 시체< 屍體 >에서 의복< 衣服 >을 벗기는 것을 후손< 後孫 >들이 적극적< 積極的 >으로 말렸기 때문에 급히 잡아당기다 그런 형태< 形態 >만을 얻었다 한다. 상기< 上記 >한 4점< 點 >의 의복중< 衣服中 > 중치막< 中致莫 >이나 도포< 道袍 >는 전< 傳 > 박장군< 朴將軍 >옷과 더불어 가장 오랜 것 중의 하나이다. 바지(고< 袴 >)는 동시대< 同時代 >의 것이 2~3 점< 點 > 전< 傳 >해 오고 있지만, 명주< 明紬 >에 솜을 두고 누빈 정교< 精巧 >한 바지가 그 시대< 時代 >에도 존재< 存在 >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귀중< 貴重 >한 자료< 資料 >이다. 이 의복< 衣服 >은 수의< 壽衣 >이지만 조선시대< 祖鮮時代 >의 일반인< 一般人 >이 (왕족< 王族 >이 아닌) 수의< 壽衣 >를 오늘날과 같이 따로 마련했다는 랑거< 랑據 >는 희미하다. 한가지 이유< 理由 >는 수종< 數種 >의 출토품< 出土品 > 중< 中 >에는 수의< 壽衣 >인데도 십여 군데씩 기운 옷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지금부터 몇10년< 年 > 전< 前 >만 해도 직물< 織物 >이 상상 이외< 想像 以外 >로 귀< 貴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의복< 衣服 >들은 수의< 壽衣 >이기 때문에 따로 취급하기 보다는, 그 시대< 時代 >의 평상복< 平常服 >이 아닌가 생각된다. ① 중치막(창의)< 中致莫(창의) > : 양 옆이 터져 3자락으로 된 의복< 衣服 >이다. 이를 현재< 現在 > 안동지방< 安東地方 >에서는 행의< 行衣 >라 하기도 한다. 이는 도포< 道袍 >안에 받쳐 입거나 양반< 兩班 >이 가내< 家內 >에서는 간단한 외출< 外出 >의 의복< 衣服 >이기도 하였다. 이 중치막< 中致莫 >의 특징< 特徵 >은 긴 칼깃에 가는 옷고름(차라리 끈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소매인 점< 點 >이다. 소지< 素地 >는 백< 白 >무명이고 박은 겹옷이다. 치 수 ; 중치막(창의) < 中致莫(창衣) >길이 115cm, 안깃길이 32.5cm, 화장 105.5cm, 깃넓이 10.5cm, 뒷품 35cm, 고대 20cm, 진동 27.2cm, 수구 21.5cm, 겉깃길이 42.5cm, 옷고름(길이 43cm, 넓이 2.4cm) ② 도포< 道袍 > : 굵은 베 홑옷이다. 전삼< 展衫 >은 최근< 最近 >의 것과 똑같은 형태< 形態 >이고 긴 칼깃에 소매길이가 아주 길다. 옷고름을 홑으로 말아 감치고, 다른 부분만 2겹으로 접어 달았다. 떨어지지 않고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겉섶을 이어 달아 총< 總 >겉섶 넓이가 52cm나 되는 단< 端 >이 넓은 포< 袍 >라 할 수 있다. 이 도포< 道袍 >에 대하여는 선조시대< 宣祖時代 >에 「 초록도포< 草綠道袍 >」가 나오므로, 이 도포< 道袍 >는 선조< 宣祖 >보다 앞서 중·명종시대< 中·明宗時代 >에 토림< 土林 >의 도학사상< 道學思想 >의 팽창으로 생성< 生成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③ 바지 고< 袴 >는 기마< 기馬 >의 필요< 必要 >에서 발생< 發生 >된 북방민족< 北方民族 >의 의복< 衣服 >이며 동시< 同時 >에 우리 민족< 民族 >의 고유복< 固有服 >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현재< 現在 >의 남자< 男子 >바지와 똑같다. 그것은 또한 기원전 1세기 경의 몽고 노인우라 출토< 出土 > 바지와도 같은 형태< 形態 >를 가지고 있다. 단지 세부적< 細部的 >인 재단< 裁斷 >처리 등이 변< 變 >해 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바지는 겉은 백< 白 >명주, 안은 무명으로 솜을 얇게 두고 1cm 간격으로 호아서 누비었다. 누비의 탓인지 마루폭이나 사폭의 구분선이 별로 선명치 않다. 치수 ; 허리둘레 120cm, 허리폭 18cm, 바지길이 88cm, 부리 30cm 이 옷은 초기< 初期 >의 중치막(창의)< 中致莫(창衣) >을 보여 주는 옷이며, 광해군< 光海君 >의 중치막< 中致莫 >과 대비< 對比 >해 보면, 광해군< 光海君 >것은 뒤가 갈라졌으므로 이를 중단< 中單 >으로 처리하였으나, 같은 것인지 여부< 與否 >는 미심< 未審 >이다.
안동대학< 安東大學 >에 소장< 所藏 >되어 있는 이 의복< 衣服 >은 안동유림< 安東儒林 >인 부림 홍씨< 洪氏 >의 14대조< 代祖 >되는 홍극가씨< 洪克加氏 >(1670년 졸)< (1670年 卒) >의 수의< 壽衣 >이다. 이는 1974년< 年 > 안동< 安東 >댐의 공사< 工事 > 관계< 關係 >로 이장< 移葬 >하던 중< 中 > 「 미라 」로 출토< 出土 >된 것이다. 의복< 衣服 >은 중치막(창의)< 中致莫(창衣) > 1점< 點 >, 도포< 道袍 > 1점< 1點 >, 바지 1점< 點 >, 버선(말< 襪 >) 1족등< 足等 > 계< 計 > 4점< 點 >인데, 이 가운데 바지는 가랭이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는 박물관< 博物館 > 팀이 시체< 屍體 >에서 의복< 衣服 >을 벗기는 것을 후손< 後孫 >들이 적극적< 積極的 >으로 말렸기 때문에 급히 잡아당기다 그런 형태< 形態 >만을 얻었다 한다. 상기< 上記 >한 4점< 點 >의 의복중< 衣服中 > 중치막< 中致莫 >이나 도포< 道袍 >는 전< 傳 > 박장군< 朴將軍 >옷과 더불어 가장 오랜 것 중의 하나이다. 바지(고< 袴 >)는 동시대< 同時代 >의 것이 2~3 점< 點 > 전< 傳 >해 오고 있지만, 명주< 明紬 >에 솜을 두고 누빈 정교< 精巧 >한 바지가 그 시대< 時代 >에도 존재< 存在 >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귀중< 貴重 >한 자료< 資料 >이다. 이 의복< 衣服 >은 수의< 壽衣 >이지만 조선시대< 祖鮮時代 >의 일반인< 一般人 >이 (왕족< 王族 >이 아닌) 수의< 壽衣 >를 오늘날과 같이 따로 마련했다는 랑거< 랑據 >는 희미하다. 한가지 이유< 理由 >는 수종< 數種 >의 출토품< 出土品 > 중< 中 >에는 수의< 壽衣 >인데도 십여 군데씩 기운 옷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지금부터 몇10년< 年 > 전< 前 >만 해도 직물< 織物 >이 상상 이외< 想像 以外 >로 귀< 貴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의복< 衣服 >들은 수의< 壽衣 >이기 때문에 따로 취급하기 보다는, 그 시대< 時代 >의 평상복< 平常服 >이 아닌가 생각된다. ① 중치막(창의)< 中致莫(창의) > : 양 옆이 터져 3자락으로 된 의복< 衣服 >이다. 이를 현재< 現在 > 안동지방< 安東地方 >에서는 행의< 行衣 >라 하기도 한다. 이는 도포< 道袍 >안에 받쳐 입거나 양반< 兩班 >이 가내< 家內 >에서는 간단한 외출< 外出 >의 의복< 衣服 >이기도 하였다. 이 중치막< 中致莫 >의 특징< 特徵 >은 긴 칼깃에 가는 옷고름(차라리 끈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소매인 점< 點 >이다. 소지< 素地 >는 백< 白 >무명이고 박은 겹옷이다. 치 수 ; 중치막(창의) < 中致莫(창衣) >길이 115cm, 안깃길이 32.5cm, 화장 105.5cm, 깃넓이 10.5cm, 뒷품 35cm, 고대 20cm, 진동 27.2cm, 수구 21.5cm, 겉깃길이 42.5cm, 옷고름(길이 43cm, 넓이 2.4cm) ② 도포< 道袍 > : 굵은 베 홑옷이다. 전삼< 展衫 >은 최근< 最近 >의 것과 똑같은 형태< 形態 >이고 긴 칼깃에 소매길이가 아주 길다. 옷고름을 홑으로 말아 감치고, 다른 부분만 2겹으로 접어 달았다. 떨어지지 않고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겉섶을 이어 달아 총< 總 >겉섶 넓이가 52cm나 되는 단< 端 >이 넓은 포< 袍 >라 할 수 있다. 이 도포< 道袍 >에 대하여는 선조시대< 宣祖時代 >에 「 초록도포< 草綠道袍 >」가 나오므로, 이 도포< 道袍 >는 선조< 宣祖 >보다 앞서 중·명종시대< 中·明宗時代 >에 토림< 土林 >의 도학사상< 道學思想 >의 팽창으로 생성< 生成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③ 바지 고< 袴 >는 기마< 기馬 >의 필요< 必要 >에서 발생< 發生 >된 북방민족< 北方民族 >의 의복< 衣服 >이며 동시< 同時 >에 우리 민족< 民族 >의 고유복< 固有服 >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현재< 現在 >의 남자< 男子 >바지와 똑같다. 그것은 또한 기원전 1세기 경의 몽고 노인우라 출토< 出土 > 바지와도 같은 형태< 形態 >를 가지고 있다. 단지 세부적< 細部的 >인 재단< 裁斷 >처리 등이 변< 變 >해 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바지는 겉은 백< 白 >명주, 안은 무명으로 솜을 얇게 두고 1cm 간격으로 호아서 누비었다. 누비의 탓인지 마루폭이나 사폭의 구분선이 별로 선명치 않다. 치수 ; 허리둘레 120cm, 허리폭 18cm, 바지길이 88cm, 부리 30cm 이 옷은 초기< 初期 >의 중치막(창의)< 中致莫(창衣) >을 보여 주는 옷이며, 광해군< 光海君 >의 중치막< 中致莫 >과 대비< 對比 >해 보면, 광해군< 光海君 >것은 뒤가 갈라졌으므로 이를 중단< 中單 >으로 처리하였으나, 같은 것인지 여부< 與否 >는 미심< 未審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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