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시 포곡면 가실리 204 호암미술관
금동여래입상< 金銅如來立像 >은 대좌< 臺座 >와 광배< 光背 >가 없고 불신< 佛身 >뿐인 여래입상< 如來立像 >으로, 민간에 소장< 所藏 >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의 금동불상< 金銅佛像 >으로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작품의 하나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 肉계 >가 있으나 낮은 편이며, 나발< 螺髮 >의 표시도 분명하지 않다. 상호< 相好 >는 네모난 모양으로 매우 풍만하면서도 평면적인데, 이것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신라불< 新羅佛 >로서의 변모를 보이는 것이다. 삼도< 三道 >의 표시가 있으나 목은 짧고, 오른손은 들어서 시무외인< 施無畏印 >을 하였으며 왼손은 내려서 여원인< 與願印 >을 하였다. 넓은 두 어깨에 걸친 통견의< 通肩衣 >는 길게 내려서 U자형 옷깃을 보이면서 전신< 全身 >을 덮고 흘러내려 두 발 이외의 몸의 굴곡을 가리고 있다. 그리고 가슴에는 내의와 군의< 裙衣 >의 매듭을 나타내었는데, 이것도 신라 여래 입상의 두 양식중의 하나다. 옷주름은 몸의 두 다리와 양측을 따라서 조각되었는데, 도식적< 圖式的 >이며 선각< 線刻 >으로 세부< 細部 >를 표시하였다. 후면에는 머리 및 상하< 上下 >에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주조 기술에 따르는 것으로 신라 금동불< 金銅佛 >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리고 전체에 도금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곳곳에 푸른 녹이 덮여 있다.
전래한 장소나 그 후의 소장< 所藏 >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일제< 日帝 > 때 일인< 日人 >으로부터 입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작품 크기에 비하여 그 솜씨는 특이한 점이 적고, 상호< 相好 >의 평면성< 平面性 > 및 의문< 衣文 >의 형식화 등의 점에서 연대< 年代 >는 8세기로 추정된다.
금동여래입상< 金銅如來立像 >은 대좌< 臺座 >와 광배< 光背 >가 없고 불신< 佛身 >뿐인 여래입상< 如來立像 >으로, 민간에 소장< 所藏 >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의 금동불상< 金銅佛像 >으로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작품의 하나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 肉계 >가 있으나 낮은 편이며, 나발< 螺髮 >의 표시도 분명하지 않다. 상호< 相好 >는 네모난 모양으로 매우 풍만하면서도 평면적인데, 이것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신라불< 新羅佛 >로서의 변모를 보이는 것이다. 삼도< 三道 >의 표시가 있으나 목은 짧고, 오른손은 들어서 시무외인< 施無畏印 >을 하였으며 왼손은 내려서 여원인< 與願印 >을 하였다. 넓은 두 어깨에 걸친 통견의< 通肩衣 >는 길게 내려서 U자형 옷깃을 보이면서 전신< 全身 >을 덮고 흘러내려 두 발 이외의 몸의 굴곡을 가리고 있다. 그리고 가슴에는 내의와 군의< 裙衣 >의 매듭을 나타내었는데, 이것도 신라 여래 입상의 두 양식중의 하나다. 옷주름은 몸의 두 다리와 양측을 따라서 조각되었는데, 도식적< 圖式的 >이며 선각< 線刻 >으로 세부< 細部 >를 표시하였다. 후면에는 머리 및 상하< 上下 >에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주조 기술에 따르는 것으로 신라 금동불< 金銅佛 >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리고 전체에 도금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곳곳에 푸른 녹이 덮여 있다.
전래한 장소나 그 후의 소장< 所藏 >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일제< 日帝 > 때 일인< 日人 >으로부터 입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작품 크기에 비하여 그 솜씨는 특이한 점이 적고, 상호< 相好 >의 평면성< 平面性 > 및 의문< 衣文 >의 형식화 등의 점에서 연대< 年代 >는 8세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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