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보존이 가장 잘된 곳이다. 성안에는 전통적인 마을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려 후기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조선 태조 6년(1397)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아 성의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 전체 모양은 네모졌으며 길이는 1410m. 동서남쪽 3곳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서로 연결된 문이 있다.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4군데의 치성이 성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성안에는 100여 가구의 만가들이 있다. 보통 가구당 3채의 초가집과 마당 텃밭이 있다.
초가집들은 3칸 정도의 일자형 안채와 아래채, 농기구 등을 보관하거나 외양간으로 쓰는 헛간채와 재래변소로 이용하는 잿간으로 이루어져있다.
현대화 물결에 따라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변형되기 시작했고 성의 일부가 자연적으로 붕괴 유실됨에 따라 1983년 사적으로 지정하고 읍성의 종합적인 보존사업이 시작되었다. 백성들이 살던 초가집 가운데 보존가치가 가장 높은 9동은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했고 일부 변형되거나 낡은 집들은 복원 수리하였다.
민가와 한국 전래의 토속적인 민속 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세시풍속과 통과의례 등 전통 생활문화를 지켜온 주민이 직접 살고 있는 민속마을이다. 성내에는 108가구 279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관청터에서는 관아와 객사 주변의 담장 월대 삼문 등을 발굴 복원하고 성곽과 문루 등을 복원하였다.
여러 성씨가 모여사는 이 마을 중앙에는 선정을 베풀었던 군수 임경업(1594-1646)의 선정비가 있다. 지금도 그의 영혼이 이 마을을 수호한다는 전설이 있어 매년 정월 보름에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동문밖 읍성의 입구에는 낙안향교가 있다. 예전에는 이 지역의 교육을 담당했으나 지금은 당시의 풍속과 생활문화를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성곽을 한바퀴 돌다보면 토담을 친 초가집들이 옛모습을 그대로 방문객을 맞고 있다. 동네 한 가운데는 차일을 친 토속음식점이 몇 채 있는데 잔칫집 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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