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산59외
조선< 朝鮮 > 제15대< 第15代 > 광해군< 光海君 >과 문성군부인유씨< 文成郡夫人柳氏 >의 묘소< 墓所 >이다. 광해군< 光海君 >은 선조< 宣祖 >의 차자< 次子 >이며 후궁< 後宮 > 공빈김씨< 恭嬪金氏 >의 소생< 所生 >이다. 선조< 宣祖 > 8년(1575)에 태어났으며 휘< 諱 >는 혼< 琿 >이다. 형< 兄 >인 임해군< 臨海君 > 대신 세자< 世子 >로 책봉되고 1608년 즉위< 卽位 >하였다. 즉위초에는 당쟁< 黨爭 >의 폐를 알고 당쟁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이에 휩쓸려 임해군< 臨海君 > 영창대군< 永昌大君 > 김제남< 金悌男 >(인목대비< 仁穆大妃 >의 부< 父 >) 등을 역모< 逆謀 >로 몰아 죽이고 모후< 母后 > 인목대비< 仁穆大妃 >를 서궁< 西宮 >(경희궁< 慶熙宮 >)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행위< 悖倫行爲 >가 많았으며 정치< 政治 >도 문란해져서 이귀< 李貴 >, 김류< 金유 >, 최명길< 崔鳴吉 >, 김자점< 金自點 > 등에 의해 폐위< 廢位 >되고 능양군< 綾陽君 >(종< 悰 >)을 받들어 인조반정< 仁祖反正 >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피신하여 의관< 醫官 > 안국신< 安國臣 >의 집에서 체포되어 서인< 庶人 >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 江華 >로 귀양보내졌다. 그후 다시 제주도< 濟州道 >로 유배시켰는데 인조< 仁祖 > 19년(1641) 7월에 사망하자 그곳에 묻혔다가 동왕< 同王 > 21년(1643)에 지금의 묘소< 墓所 >에 천장< 遷葬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光海君 >은 재위< 在位 > 15년간< 15년간 >(1608∼1623) 서적< 書籍 >을 편찬 간행하여 임진왜란< 壬辰倭亂 > 이후의 사고< 史庫 >를 정비하고 성지< 城址 > 궁궐< 宮闕 > 병기< 兵器 >를 수리< 修理 >하였으며 호패< 號牌 >를 실시하는 등 내치< 內治 >와 국방정비< 國防整備 > 및 외교< 外交 >에 힘을 기울였다. 문성군부인유씨< 文成郡夫人柳氏 >는 지돈령부사< 知敦寧府事 > 유자신< 柳自新 >의 여< 女 >로 선조< 宣祖 > 31년(1598)에 태어났다. 광해군< 光海君 >이 즉위< 卽位 >하자 왕비< 王妃 >로 책봉< 冊封 >되고 광해군과 같이 폐위< 廢位 >되어 강화< 江華 >로 함께 유배< 流配 > 당하였으며 유씨< 柳氏 >는 이곳에서 인조원년< 仁祖元年 >(1623년) 10월 8일 사망하였다. 동년< 同年 > 10월 30일 양주군< 楊州郡 > 적성동에 장사< 葬死 >했다가 광해군사후< 光海君死後 > 같은 묘역< 墓域 >에 천장< 遷葬 >하였다. 광해군< 光海君 >과 부인유씨< 夫人柳氏 >의 묘< 墓 >는 쌍분< 雙墳 >이며 묘< 墓 >의 시설< 施設 >은 봉분< 封墳 > 곡장< 曲墻 > 혼유석< 魂遊石 > 장명등< 長明燈 > 문인석< 文人石 > 등이 있으나 초라하다. 기록은 광해군묘비명< 光海君墓碑名 >이 '광해군지묘< 光海君之墓 >'이고 비후면< 碑後面 >에 '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명철조삼일< 辛巳七月初一日病卒於濟州命輟朝三日 >'이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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