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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릉 - 중종대왕 원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능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

온릉<溫陵>은 제11대<第11代> 중종대왕<中宗大王> 원비<元妃>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陵>이다.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본관<本貫>은 거창<居昌>이고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여<女>로서 성종<成宗> 18년(1487년) 1월 14일 탄생<誕生>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 5년(1499년)에 진성대군<晋城大君>과 가례<嘉禮>를 올리고 부부인<府夫人>으로 봉<封>하여졌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중종<中宗> 원년<元年>(1506년) 9월 2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으며 반정공신<反正功臣>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왕비<王妃>의 부<父> 신수근<愼守勤>은 반정<反正>으로 피주<被誅>되었으며, 죄인<罪人>의 여<女>가 왕비<王妃>로는 부적<不適>하다는 강청<强請>으로 왕비<王妃> 책봉<冊封> 7일만에 폐출<廢出>되어 사제<私第>로 나아갔다. 처음 정현조<鄭顯祖>의 집에 거처<居處>하다가 9월 24일 조부<祖父> 신승선가<愼承善家>로 이거<移居>하였다. 중종<中宗>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가 중종<中宗> 10년(1515년) 2월에 승하<昇遐> 후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 등의 복위상소<復位上疏>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 폐비<廢妃> 신씨<愼氏>는 명종<明宗> 12년(1557년) 12월 7일 우거<寓居> 사제<私第>에서 소생<所生>없이 춘추<春秋> 71세로 승하<昇遐>하였으며, 친정묘역<親庭墓域> 해좌사향<亥坐巳向>(북북서<北北西>에서 남남동향<南南東向>) 언덕에 장례<葬禮>지냈고, 신수근<愼守勤>의 손<孫> 사원<思遠>이 봉사<奉祀>하였다. 숙종<肅宗> 24년(1698년) 전<前> 현감<縣監> 신규<申奎>의 왕비추복상소<王妃追復上疏>가 있었으나, 묘당<廟堂>의 의론<議論>이 일치<一致>되지 아니함에 숙종<肅宗>은 예조<禮曹>에 명<命>하여 연경궁지<延慶宮址>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춘추<春秋>로 사당<祠堂>에 봉제<奉祭>케 하고 한식절<寒食節>엔 묘제<墓祭>를 지내게 했다. 영조<英祖> 15년(1739년) 3월 28일 익호<謚號>를 단경<端敬>으로 능호<陵號>를 온릉<溫陵>으로 추복<追復>하였으며, 이 해 4월 능상<陵上>의 상설<象設>을 새로이 설치<設置>하면서 단종<端宗> 장릉<莊陵>의 봉릉예<奉陵例>로서 하되 추봉<追封>된 왕비릉<王妃陵>인 정릉<貞陵>, 사릉<思陵>의 상설<象設>을 따르게 하였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능침<陵寢> 주위<周圍>로 양석<羊石>·호석<虎石> 각 1쌍을 배치<配置>하고 능전<陵前>에 상석<床石> 1좌<座>와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을 세웠으며, 그 밖으로 3면의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였다. 그 한단 아래 제2계<第2階>엔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相面> 배치<配置>되었으며, 중앙<中央>에 사각옥형<四角屋形> 명등석<明燈石> 1좌<座>가 있다. 제3계<第3階>는 없다. 병석<屛石>과 난간석<欄干石>을 생략<省略>하고 수석<獸石>을 반감<半減>하고 무석<武石>을 세우지 아니하였음은 추봉비릉<追封妃陵>의 예<例>에 따른 것이다. 능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丁字閣> 동측<東側>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단경왕후온릉<朝鮮國端敬王后溫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순조<純祖> 7년(1807년) 4월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전문<紅箭門>이 있다. 재실<齋室>은 의정부<議政府> 벽제간<碧蹄間> 도로변<道路邊> 북측<北側>에 있었으나 1970년도<年度> 도로확장시<道路擴張時> 철거<撤去>되었으며 홍전문<紅箭門> 서남측<西南側>의 한식<韓式> 건물<建物>은 온릉관리사무소<溫陵管理事務所>로 사용<使用>하기 위하여 건립<建立>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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