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2 일대
창녕군의 고분은 크게 3군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 1군은 교동 뒤편의 구릉에 위치한 것으로 제일 높은 교동 129번지에 있는 왕릉이라고 불리우는 古塚을 중심으로 한 유적이다. 창녕은 본시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不斯國]으로, 比自火郡(혹은 比斯伐)이라고 하는데 진흥왕 16년(555)에 州를 설치하여 下州로 폐하였다. 경덕왕대에는 화왕군으로 불리우다 고려 때에 창녕군으로 되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이름이다. 제 2군은 창녕의 동북쪽 목우산 기슭에서 서쪽으로 송현동 일대에 널리 퍼져 있고 그 일부는 교동지구에까지 뻗치고 있다. 원래 80여기 가량의 큰 고분군이었으나 현재 고분이 형태가 남아있는 것은 16기에 불과하다. 제 3군 역시 송현동 구역인데 창녕의 동쪽 화왕산에서 흐르는 시내의 북쪽 송현동석불이 있는 부근에 약 20여기가 있었는데 대부분 논으로 개간되어 현재 원형이 일부라도 남은 곳은 몇 기 정도이다. 이 유적이 교동고분군과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유구의 구조나 유물의 성격이 거의 같다고 보여지지만 보고가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1918년에 교동고분군이 발굴되었을 때에 송현동고분군 제 89, 91호분도 발굴되었다고 하나 역시 보고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기타 자료를 참고하면 교동 7, 11호분과 더불어 송현동 8, 9호분에서 대향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송현동고분군을 비롯한 창녕고분군의 거의 대부분이 도굴의 피해를 입게 된 것은 일제시대의 약탈적인 발굴에 그 원인이 있다. 즉 1918년의 엄청난 양의 유물에 대한 도굴행위에 유발하였고 그 결과 권력과 결탁한 도굴행위가 대낮에도 공공연히 행하여졌으며, 도굴된 유물의 대부분은 일본상인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그 예로 현재 일본의 [오꾸라(小倉) 콜렉션]이라는 것도 당시에 대구에 살고 있었던 小倉이 수집한 것으로 그 대부분이 가야지역의 문화재라는 사실로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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