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삼국시대의 고분군으로 읍의 동쪽 목마산(牧馬山)의 산록 송현동 구릉에서부터 읍의 북쪽 교동 고지에 이르기까지 분포되어 있다.
그중 교동 산 5번지에는 원래 왕릉이라 불리고 있는 대고분(교동 제7호, 금서 제22호)을 중심으로 주위에 대소 70여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으나 현재에는 8기만 남아 있다.
그러나 그나마 봉토(封土)의 파손이 매우 심하다. 1918∼1919년(大正 7∼8)의 대발굴과 도굴에 의해서 무참히 훼손되고 내부의 유물이 일본 도굴꾼에 의해 탈취되었다고 하는데 그 양이 마차 20대, 화차 2량분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보고서도 간행되지 않았고 출토유물의 상당부분 행방이 애매하여 지금에 이른 것도 통탄할 뿐이다.
다만 1918년 濱田耕作, 梅原末治씨 등이 발굴한 21호, 31호분에 대한 유일한 조사기록이 있을 뿐이어서 대량 도굴된 양에 비교할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1918년 조선총독부의 대대적인 발굴(谷井濟一일행) 이후 그 결과 처리의 잘못으로 도굴행위를 유발하는 화근이 되어 도굴의 공공연한 자행으로 가야시대의 보고(寶庫)는 일시에 파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도굴된 유물들은 대구지방 상인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유출되어 민족 문화유산의 결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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