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용문사< 龍門寺 > 대웅전< 大雄殿 >아래 향좌측< 向左側 >에 있는 관음전< 觀音殿 >(요사< 寮舍 >를 겸함)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현재 사찰측에는 이 상< 像 >의 조성< 造成 >이나 이전봉안< 移轉奉安 >에 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1993년에 행했던 개금불사< 改金佛事 >때도 복장< 腹藏 >을 열었을때도 이미 내용물이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용문사< 龍門寺 >는 수양대군이 세종29년(1447)에 모후< 母后 >인 소헌왕후< 昭憲王后 >를 위해 불상< 佛像 > 2구< 軀 >와 보살상< 菩薩像 > 8구< 軀 >를 봉안< 奉安 >한 일도 있었으나, 한국전쟁시 용문사< 龍門寺 >가 전소< 全燒 >하였으므로 이 상< 像 >은 본래의 용문사< 龍門寺 > 보살상< 菩薩像 >이 아닐 가능성이 크고, 이후 어디서 어떤 연유로 이곳에 봉안되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양식적인 특성으로 볼 때 전형적인 고려후기< 高麗後期 > 보살양식< 菩薩樣式 >을 계승한 조선초기< 朝鮮初期 >의 작< 作 >으로 판단된다. 용문사< 龍門寺 >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은 상체< 上體 >를 다소 뒤로 제낀 채 전신< 全身 >에는 영락< 瓔珞 >을 가득 드리우고 있어 전체적으로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상< 像 >은 결발< 結髮 >모습이나 전신< 全身 >에 드리워진 영락< 瓔珞 >과 가슴께의 금구장여< 金具裝飾 > 등에서 영덕< 盈德 > 장육사< 莊陸寺 > 건칠보살좌상보살< 乾漆菩薩坐像菩薩 >이나 고려말-조선초기 작으로 알려진 청양< 靑陽 > 운장암< 雲藏庵 > 철보살좌상< 鐵菩薩坐像 >·상주< 尙州 > 갑장사< 甲藏寺 >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과 좋은 비교가 된다. 상호< 相好 >는 개금시< 改金時 >의 현대적< 現代的 > 표현에 의해 미소가 없어 보이나 작은 이목구비< 耳目口鼻 >와 양볼에 탄력있게 살이 있는 원만한 얼굴을 보이고 있으며, 높게 결발< 結髮 >한 고계< 高계 >에 목조보관< 木造寶冠 >을 쓰고 양 어깨에 보발< 寶髮 >이 [ ]식으로 마치 리본처럼 표현되었는데, 이런 표현은 장육사< 莊陸寺 > 상< 像 >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수법이다. 그러나, 보관< 寶冠 >은 머리부분과 꼭 맞지 않을뿐더러 목조< 木造 >여서 조선전기< 朝鮮前期 >에 유행했던 보살관< 菩薩冠 >처럼 양쪽으로 흩날리는 관수식< 冠垂飾 >을 보이고 있어 원래의 관< 冠 >이 아니라 후대< 後代 >에 보수한 것 같다. 자세는 완만하게 내려 온 어깨와 당당한 가슴을 하고 수인< 手印 >은 중품중생인< 中品中生印 >을 지은채 길상좌< 吉祥坐 >를 결< 結 >하였는데, 가슴에 수식< 垂飾 >이 달린 1줄의 영락< 瓔珞 >이 있고, 복부< 腹部 >에는 군의< 裙衣 >자락을 묶은 매듭이 보이며, 왼쪽 가슴께는 승각기를 고정시킨 삼각형 금구장식< 金具裝飾 >이 있다. 이같은 신체에 걸쳐진 통견< 通肩 >의 대의< 大衣 >는 목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다가 손목부분에서 한번 접혀지고 오른쪽 소매자락은 배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였고, 발목부분에서 부드럽게 중첩된 팔자< 八字 >형을 그리며 양 무릎을 덮고 그 위에는 영락이 장식되었다. 이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은 탄력있는 장대< 長大 >한 신체에 당당함과 화려함이 넘치는데, 이렇듯 고계< 高계 >나 가슴과 양 무릎에 영락이 드리워진 점, 왼쪽가슴에 삼각형의 금구장식이 있는 점은 전형적인 14세기 보살양식을 보여주지만 장육사< 莊陸寺 > 상< 像 >과 비교할 때 영락< 瓔珞 >이 다소 간략해지고, 파계사< 把溪寺 > 목조관음보살좌상< 木造觀音菩薩坐像 >(1447년 이전)보다는 상호나 신체가 덜 경직된 느낌을 주므로 장육사< 莊陸寺 > 상< 像 >(1395)과 같은 시기이거나 그보다 조금 늦은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용문사< 龍門寺 > 대웅전< 大雄殿 >아래 향좌측< 向左側 >에 있는 관음전< 觀音殿 >(요사< 寮舍 >를 겸함)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현재 사찰측에는 이 상< 像 >의 조성< 造成 >이나 이전봉안< 移轉奉安 >에 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1993년에 행했던 개금불사< 改金佛事 >때도 복장< 腹藏 >을 열었을때도 이미 내용물이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용문사< 龍門寺 >는 수양대군이 세종29년(1447)에 모후< 母后 >인 소헌왕후< 昭憲王后 >를 위해 불상< 佛像 > 2구< 軀 >와 보살상< 菩薩像 > 8구< 軀 >를 봉안< 奉安 >한 일도 있었으나, 한국전쟁시 용문사< 龍門寺 >가 전소< 全燒 >하였으므로 이 상< 像 >은 본래의 용문사< 龍門寺 > 보살상< 菩薩像 >이 아닐 가능성이 크고, 이후 어디서 어떤 연유로 이곳에 봉안되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양식적인 특성으로 볼 때 전형적인 고려후기< 高麗後期 > 보살양식< 菩薩樣式 >을 계승한 조선초기< 朝鮮初期 >의 작< 作 >으로 판단된다. 용문사< 龍門寺 >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은 상체< 上體 >를 다소 뒤로 제낀 채 전신< 全身 >에는 영락< 瓔珞 >을 가득 드리우고 있어 전체적으로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상< 像 >은 결발< 結髮 >모습이나 전신< 全身 >에 드리워진 영락< 瓔珞 >과 가슴께의 금구장여< 金具裝飾 > 등에서 영덕< 盈德 > 장육사< 莊陸寺 > 건칠보살좌상보살< 乾漆菩薩坐像菩薩 >이나 고려말-조선초기 작으로 알려진 청양< 靑陽 > 운장암< 雲藏庵 > 철보살좌상< 鐵菩薩坐像 >·상주< 尙州 > 갑장사< 甲藏寺 >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과 좋은 비교가 된다. 상호< 相好 >는 개금시< 改金時 >의 현대적< 現代的 > 표현에 의해 미소가 없어 보이나 작은 이목구비< 耳目口鼻 >와 양볼에 탄력있게 살이 있는 원만한 얼굴을 보이고 있으며, 높게 결발< 結髮 >한 고계< 高계 >에 목조보관< 木造寶冠 >을 쓰고 양 어깨에 보발< 寶髮 >이 [ ]식으로 마치 리본처럼 표현되었는데, 이런 표현은 장육사< 莊陸寺 > 상< 像 >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수법이다. 그러나, 보관< 寶冠 >은 머리부분과 꼭 맞지 않을뿐더러 목조< 木造 >여서 조선전기< 朝鮮前期 >에 유행했던 보살관< 菩薩冠 >처럼 양쪽으로 흩날리는 관수식< 冠垂飾 >을 보이고 있어 원래의 관< 冠 >이 아니라 후대< 後代 >에 보수한 것 같다. 자세는 완만하게 내려 온 어깨와 당당한 가슴을 하고 수인< 手印 >은 중품중생인< 中品中生印 >을 지은채 길상좌< 吉祥坐 >를 결< 結 >하였는데, 가슴에 수식< 垂飾 >이 달린 1줄의 영락< 瓔珞 >이 있고, 복부< 腹部 >에는 군의< 裙衣 >자락을 묶은 매듭이 보이며, 왼쪽 가슴께는 승각기를 고정시킨 삼각형 금구장식< 金具裝飾 >이 있다. 이같은 신체에 걸쳐진 통견< 通肩 >의 대의< 大衣 >는 목부분에서 한번 접혀 양 팔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다가 손목부분에서 한번 접혀지고 오른쪽 소매자락은 배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곡선을 형성하였고, 발목부분에서 부드럽게 중첩된 팔자< 八字 >형을 그리며 양 무릎을 덮고 그 위에는 영락이 장식되었다. 이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은 탄력있는 장대< 長大 >한 신체에 당당함과 화려함이 넘치는데, 이렇듯 고계< 高계 >나 가슴과 양 무릎에 영락이 드리워진 점, 왼쪽가슴에 삼각형의 금구장식이 있는 점은 전형적인 14세기 보살양식을 보여주지만 장육사< 莊陸寺 > 상< 像 >과 비교할 때 영락< 瓔珞 >이 다소 간략해지고, 파계사< 把溪寺 > 목조관음보살좌상< 木造觀音菩薩坐像 >(1447년 이전)보다는 상호나 신체가 덜 경직된 느낌을 주므로 장육사< 莊陸寺 > 상< 像 >(1395)과 같은 시기이거나 그보다 조금 늦은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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