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성청룡사금동관음보살좌상 - 도상이나 조각수법·청동으로 제작한 점을 보아 죽목되는 작품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28

안성시< 安城市 > 서운산< 瑞雲山 > 청룡사< 靑龍寺 > 대웅전에는 불단< 佛壇 >의 왼쪽에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이 모셔져 있다. 원래 이 상< 像 >은 관음전< 觀音殿 >에 봉안되었던 것으로서 사찰측에 전해오는 조성< 造成 >관련 기록이 없으나, 최근에 「강희육십일년개정< 康熙六十一年改正 >」이라는 명기< 銘記 >가 있는 복장유물< 腹臟遺物 >이 발견되어 강희< 康熙 > 61년(1722, 경종< 景宗 > 2년)보다 훨씬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 像 >의 보관< 寶冠 >과 대좌< 臺座 >는 원래의 것이 아니지만, 전체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할 뿐더러 도상< 圖像 >이나 조각수법< 彫刻手法 >·청동< 靑銅 >으로 제작한 점을 보아 주목되는 작품이다. 청룡사< 靑龍寺 >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은 전체적으로 단아한 느낌을 주는 상< 像 >으로서 비교적 양감< 量感 >도 풍부하고 고려시대의 조각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신체< 身體 >는 다소 장대< 長大 >해진 느낌이 든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길상좌< 吉祥座 >의 자세를 한 이 상< 像 >은 적당히 살이 있는 얼굴에 사실성이 깃든 이목구비< 耳目口鼻 >·미간< 眉間 >의 도톰한 백호< 白毫 >·장식적인 동글동글한 보발< 寶髮 >을 높게 결발< 結髮 >한 후 양 어깨위로 다섯 가닥씩 흘러 내리게 한 표현·목의 삼도< 三道 > 등에서 단정하면서도 위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인< 手印 >은 중품중생인< 中品中生印 >을 취하고 있는데, 즉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 中指 >를 맞대고 외장< 外掌 >하고 있고 왼손은 배부분까지 올려 엄지와 중지< 中指 >를 맞대고 있다. 가슴에는 영락< 瓔珞 >이 장식되었으며, 군의< 裙衣 >의 두터운 선< 선 >아래에는 가는 띠매듭을 여러번 꼬아서 묶어 주위에 볼륨감을 표출시켰다. 이같은 신체< 身體 >에 걸쳐진 법의< 法衣 >는 양 어깨에서 마치 깃처럼 한번씩 접혀진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배부분에서 큰 w자형 의문< 衣文 >을 그리면서 양 무릎을 감싸고 발목부분에 밀집되었다가 다시 부채꼴모양으로 퍼진 의문< 衣文 >을 형성했으므로 양쪽 무릎에는 부드러운 곡선형 의문< 衣文 >이 생겼다. 제작년대< 製作年代 >는 이 상< 像 >이 청동< 靑銅 >으로 제작된 점, 보발< 寶髮 > 표현방식이나 얼굴과 신체< 身體 >의 사실성 및 단아한 분위기, 화려한 영락 등에서 고려후기< 高麗後期 > 보살양식< 菩薩樣式 >을 계승하고 있지만 신체가 장대< 長大 >해지고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 단순화된 영락장식 등을 고려해 보면 조선초기< 朝鮮初期 >인 15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상< 像 >은 파계사< 把溪寺 > 목조관음보살좌상< 木造觀音菩薩坐像 >(1447년 중수)·양평< 楊平 > 용문사< 龍門寺 > 관음보살좌상< 觀音菩薩坐像 >(15세기 초)·대승사< 大乘寺 > 금동보살좌상< 金銅菩薩坐像 >(15세기 후반 경)과 함께 조선초기< 朝鮮初期 > 보살< 菩薩 >의 특징을 갖고 있으나 장육사< 莊陸寺 > 상< 像 >과 파계사< 把溪寺 > 상< 像 > 보다는 영락< 瓔絡 >이 간략히 된 점으로 보아 그 보다는 조금 늦게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