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산31
박원종< 朴元宗 > 묘역은 남양주시< 南楊州市 > 와부읍< 瓦阜邑 > 도곡1리< 陶谷1里 > 산 31번지 금대산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 封墳 >은 1기< 基 >로 묘표< 墓表 >의 기록으로 보아 합장< 合葬 >이 아닌 단독장< 單獨葬 >으로 판단된다. 석물< 石物 >로는 묘표< 墓表 > 1기< 基 >, 상석< 床石 > 1기< 基 >, 향노석< 香爐石 > 1기< 基 >, 장명등< 長明燈 > 1기< 基 >, 망주석< 望柱石 > 2기< 基 >, 문관석< 文官石 > 2기< 基 > 및 계체석< 階체石 > 등이 있다. 그리고 묘역의 전방 아래에는 신도비< 神道碑 > 1기< 基 >가 세워져 있다. 봉분< 封墳 > 앞의 묘표< 墓表 >는 월두형< 月頭形 > 비신< 碑身 >과 비대< 碑臺 >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비신< 碑身 >이 51.5×14.5×130㎝이고 비대< 碑臺 >가 101×60×39㎝이다. 비신의 전면< 前面 >에 횡서< 橫書 >로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 >"이란 글을 예서< 隸書 >로 기록하고 5행의 종서< 縱書 >를 행서< 行書 >로 "병충구의결책익운정국추성보< 秉忠舊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 > 사< 社 > 우세정난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 祐世定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 > 정부령의정겸령< 政府領議政兼領 > 경연홍문관예문< 經筵弘文館藝文 > 관춘추관관상감사평성부원군< 館春秋館觀象監事平城府院君 > 증< 贈 > 시충렬박공원종지묘< 諡忠烈朴公元宗之墓 >"라고 새겨져 있다. 묘표의 후면에는 기록이 없어 언제 건립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묘표 앞의 상석은 190×121×30㎝의 규모로 비교적 큰 편이며 4개의 고석< 鼓石 >으로 받쳐져 있다. 상석 앞의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향노석< 香爐石 >은 팔각< 八角 >으로 직경이 44㎝, 높이가 86㎝의 대형으로 상석보다 높게 보이고 있다. 조각의 기법에 있어서도 나무로 된 향탁< 香卓 >의 문양을 비교적 정교하게 묘사한 수작< 秀作 >이다. 상석 앞의 장명등< 長明燈 >은 옥개석< 屋蓋石 >이 90.5×90.5×75㎝, 몸체가 58×57×138㎝의 규모이다. 화창< 火窓 >에는 등잔< 燈盞 >을 놓을 수 있는 홈이 파져 있고, 화창 밑에는 안상문< 眼象紋 >내에 꽃모양을 조각해 놓았으며 그 밑으로는 사방에 기린< 麒麟 >을 조각해 놓았는데 전면의 기린< 麒麟 >만 그 형태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수작< 秀作 >의 작품이다. 장명등의 좌우에는 망주석< 望柱石 >이 1쌍 위치하고 있는데 팔각< 八角 >으로 규모는 높이 211㎝로 대형이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망주석이 아니며 규모 및 형태에 있어서 화표< 華表 >에 가깝다. 하단은 연판문< 蓮瓣紋 >과 안상문< 眼象紋 >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놓았으며, 상단 역시 연화문< 蓮花紋 >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놓은 수작< 秀作 >이다. 망주석의 전방 좌우에는 문관석< 文官石 >이 1쌍 배치되어 있는데, 규모는 83×68×245㎝로 역시 다른 문관석에 비해 규모가 크고 중량감이 있다. 형태는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양식인 복두< 복頭 >에 공복< 公服 >을 입고 홀< 笏 >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문관석의 특징은 복두< 복頭 >를 그 어느 문관석 보다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즉 복두에 끈이 있어 목 부분에서 매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고자가 처음 실견한 것으로 복두< 복頭 >의 착용방법을 확실하게 고증할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된다. 또한 복두< 복頭 > 후면의 깃 부분까지 자세히 묘사함에 따라 복두의 복원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그리고 공복< 公服 >의 의접선< 衣褶線 >의 표현도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후면의 대< 帶 >와 후수< 後綬 >의 조각도 뛰어나다.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적이며, 안면< 顔面 >의 표현도 매우 사실적이다.
박원종< 朴元宗 > 묘역은 남양주시< 南楊州市 > 와부읍< 瓦阜邑 > 도곡1리< 陶谷1里 > 산 31번지 금대산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 封墳 >은 1기< 基 >로 묘표< 墓表 >의 기록으로 보아 합장< 合葬 >이 아닌 단독장< 單獨葬 >으로 판단된다. 석물< 石物 >로는 묘표< 墓表 > 1기< 基 >, 상석< 床石 > 1기< 基 >, 향노석< 香爐石 > 1기< 基 >, 장명등< 長明燈 > 1기< 基 >, 망주석< 望柱石 > 2기< 基 >, 문관석< 文官石 > 2기< 基 > 및 계체석< 階체石 > 등이 있다. 그리고 묘역의 전방 아래에는 신도비< 神道碑 > 1기< 基 >가 세워져 있다. 봉분< 封墳 > 앞의 묘표< 墓表 >는 월두형< 月頭形 > 비신< 碑身 >과 비대< 碑臺 >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비신< 碑身 >이 51.5×14.5×130㎝이고 비대< 碑臺 >가 101×60×39㎝이다. 비신의 전면< 前面 >에 횡서< 橫書 >로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 >"이란 글을 예서< 隸書 >로 기록하고 5행의 종서< 縱書 >를 행서< 行書 >로 "병충구의결책익운정국추성보< 秉忠舊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 > 사< 社 > 우세정난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 祐世定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 > 정부령의정겸령< 政府領議政兼領 > 경연홍문관예문< 經筵弘文館藝文 > 관춘추관관상감사평성부원군< 館春秋館觀象監事平城府院君 > 증< 贈 > 시충렬박공원종지묘< 諡忠烈朴公元宗之墓 >"라고 새겨져 있다. 묘표의 후면에는 기록이 없어 언제 건립한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묘표 앞의 상석은 190×121×30㎝의 규모로 비교적 큰 편이며 4개의 고석< 鼓石 >으로 받쳐져 있다. 상석 앞의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향노석< 香爐石 >은 팔각< 八角 >으로 직경이 44㎝, 높이가 86㎝의 대형으로 상석보다 높게 보이고 있다. 조각의 기법에 있어서도 나무로 된 향탁< 香卓 >의 문양을 비교적 정교하게 묘사한 수작< 秀作 >이다. 상석 앞의 장명등< 長明燈 >은 옥개석< 屋蓋石 >이 90.5×90.5×75㎝, 몸체가 58×57×138㎝의 규모이다. 화창< 火窓 >에는 등잔< 燈盞 >을 놓을 수 있는 홈이 파져 있고, 화창 밑에는 안상문< 眼象紋 >내에 꽃모양을 조각해 놓았으며 그 밑으로는 사방에 기린< 麒麟 >을 조각해 놓았는데 전면의 기린< 麒麟 >만 그 형태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수작< 秀作 >의 작품이다. 장명등의 좌우에는 망주석< 望柱石 >이 1쌍 위치하고 있는데 팔각< 八角 >으로 규모는 높이 211㎝로 대형이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망주석이 아니며 규모 및 형태에 있어서 화표< 華表 >에 가깝다. 하단은 연판문< 蓮瓣紋 >과 안상문< 眼象紋 >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놓았으며, 상단 역시 연화문< 蓮花紋 >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놓은 수작< 秀作 >이다. 망주석의 전방 좌우에는 문관석< 文官石 >이 1쌍 배치되어 있는데, 규모는 83×68×245㎝로 역시 다른 문관석에 비해 규모가 크고 중량감이 있다. 형태는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양식인 복두< 복頭 >에 공복< 公服 >을 입고 홀< 笏 >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문관석의 특징은 복두< 복頭 >를 그 어느 문관석 보다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즉 복두에 끈이 있어 목 부분에서 매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고자가 처음 실견한 것으로 복두< 복頭 >의 착용방법을 확실하게 고증할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된다. 또한 복두< 복頭 > 후면의 깃 부분까지 자세히 묘사함에 따라 복두의 복원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그리고 공복< 公服 >의 의접선< 衣褶線 >의 표현도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후면의 대< 帶 >와 후수< 後綬 >의 조각도 뛰어나다.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적이며, 안면< 顔面 >의 표현도 매우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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