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481-1
한백겸(1552~1615) 선생의 자는 명길< 鳴吉 >, 호는 구암< 久庵 >, 본관은 청주이며 민순< 閔純 >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18) 교정청< 校正廳 >이 신설되자 정구< 鄭毬 > 등과 함께 『경서훈해< 經書訓解 >』의 교정을 맡아 보았다. 이듬해 천거로 중부참봉< 中部參奉 >이 되고 이어 경기전참봉< 慶基殿參奉 >을 지내고, 선릉참봉< 宣陵參奉 >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1589년 그는 자살한 정여립< 鄭汝立 >의 시체 앞에서 통곡을 한데다 그 시체를 후히 염< 殮 >한 사실이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 李震吉 >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장형< 杖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과 유형< 流刑 >(죄인을 먼곳이나 섬으로 귀양 보내는 형벌)의 형벌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사면< 大赦免 >으로 풀려나와 내자사직장< 內資寺直長 >으로 기용되고, 이후 호조좌랑, 형조정랑, 청주목사등을 거쳐 1607년 판결사< 判決事 >를 역임하고 이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 殯殿都監堂上 >이 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강원도안무사< 江原道按撫使 >를 거쳐 이듬해 파주목사가 되었다가 얼마뒤에 사임했다.
역학에 밝아 선조때 『주역전의< 周易傳義 >』의 교정을 맡아보았으며, 『동국지리지< 東國地理志 >』를 저술하여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원주의 칠봉서원< 七奉書院 >에서 제향하고 있다.
한백겸(1552~1615) 선생의 자는 명길< 鳴吉 >, 호는 구암< 久庵 >, 본관은 청주이며 민순< 閔純 >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18) 교정청< 校正廳 >이 신설되자 정구< 鄭毬 > 등과 함께 『경서훈해< 經書訓解 >』의 교정을 맡아 보았다. 이듬해 천거로 중부참봉< 中部參奉 >이 되고 이어 경기전참봉< 慶基殿參奉 >을 지내고, 선릉참봉< 宣陵參奉 >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1589년 그는 자살한 정여립< 鄭汝立 >의 시체 앞에서 통곡을 한데다 그 시체를 후히 염< 殮 >한 사실이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 李震吉 >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장형< 杖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과 유형< 流刑 >(죄인을 먼곳이나 섬으로 귀양 보내는 형벌)의 형벌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사면< 大赦免 >으로 풀려나와 내자사직장< 內資寺直長 >으로 기용되고, 이후 호조좌랑, 형조정랑, 청주목사등을 거쳐 1607년 판결사< 判決事 >를 역임하고 이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 殯殿都監堂上 >이 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강원도안무사< 江原道按撫使 >를 거쳐 이듬해 파주목사가 되었다가 얼마뒤에 사임했다.
역학에 밝아 선조때 『주역전의< 周易傳義 >』의 교정을 맡아보았으며, 『동국지리지< 東國地理志 >』를 저술하여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원주의 칠봉서원< 七奉書院 >에서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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