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산301
조선 세종<世宗>∼세조<世祖> 연간의 문신인 강맹경(1410∼1461)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상하 2단의 계체석<階체石>을 두어 상계<上階>에 봉분·묘비·상석을 두고 중계<中階>의 중앙에 장명등, 좌우에 문인석을 배열하였다. 우측 문인석 바로 뒤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최근에 팔작지붕형 비각<碑閣>을 설치하였다. 묘비는 화관석<花冠石>·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하나의 화강암으로 제작되었고,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신도비는 화관석·비신·기대에 전체를 받치는 대좌<臺座>로 구성되어 있고, 비문은 신숙주<申叔舟>가 찬<撰>하고 강희안<姜希顔>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써서 세조 8년(1462)에 건립한 것이다. 한편, 그의 묘역 바로 위쪽에는 부모인 강우덕<姜友德>과 재령이씨<載寧李氏>의 합장묘로 추정되는 묘역이 위치한다. 이 묘역에는 상석 2기, 장명등, 문인석 1쌍 등의 석물이 있다. 강맹경은 세종 8년(1426)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세종 11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 지승문원사<智承文院事>·집의<執義> 등의 역임하였다. 문종<文宗> 원년(1451)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고, 이듬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단종<端宗> 원년(1453)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서 계유정란<癸酉靖難> 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왔고, 뒤이어 예문관제학<藝文館制學>·의정부우참판<議政府右參判>을 역임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일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정되고,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조 2년(1456) 좌찬성<佐贊成>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세조 4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조선 세종<世宗>∼세조<世祖> 연간의 문신인 강맹경(1410∼1461)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상하 2단의 계체석<階체石>을 두어 상계<上階>에 봉분·묘비·상석을 두고 중계<中階>의 중앙에 장명등, 좌우에 문인석을 배열하였다. 우측 문인석 바로 뒤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최근에 팔작지붕형 비각<碑閣>을 설치하였다. 묘비는 화관석<花冠石>·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하나의 화강암으로 제작되었고,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신도비는 화관석·비신·기대에 전체를 받치는 대좌<臺座>로 구성되어 있고, 비문은 신숙주<申叔舟>가 찬<撰>하고 강희안<姜希顔>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써서 세조 8년(1462)에 건립한 것이다. 한편, 그의 묘역 바로 위쪽에는 부모인 강우덕<姜友德>과 재령이씨<載寧李氏>의 합장묘로 추정되는 묘역이 위치한다. 이 묘역에는 상석 2기, 장명등, 문인석 1쌍 등의 석물이 있다. 강맹경은 세종 8년(1426)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세종 11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 지승문원사<智承文院事>·집의<執義> 등의 역임하였다. 문종<文宗> 원년(1451)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고, 이듬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단종<端宗> 원년(1453)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서 계유정란<癸酉靖難> 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왔고, 뒤이어 예문관제학<藝文館制學>·의정부우참판<議政府右參判>을 역임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일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정되고,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조 2년(1456) 좌찬성<佐贊成>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세조 4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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