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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흠묘역및신도비 - 조선시대 문신인 신흠선생과 그의 부인의 합장묘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광주군 퇴촌면 산12-1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연간의 문신이며 한문학의 정종<正宗>으로 칭송되었던 신흠(1566∼1628)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의 합장묘이다. 묘역은 사성<沙城>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가까이 모여 있다. 상석 전방에는 장명등이 있으며,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인조 6년(1628)에 건립된 것으로 후면에 그가 순수 작성한 비문이 세워져 있다. 숙종<肅宗> 25년(1699)에 건립된 신도비는 묘역의 동남쪽 약 200m 지점 묘역 입구에 세워졌는데, 이수<이首>·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었다. 총 높이 335㎝의 대형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 감각과 세부적으로 생동감 있는 조각 표현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신흠은 선조 18년(1585)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 차례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으나 이이<李珥>를 두둔한 말로 인하여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東人>으로부터 이이의 무리라는 배척을 받고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가 곧 경원훈도<訓導>·광주훈도를 거쳐 감찰<監察>·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정철<政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여 지평<持平>으로 승진되고, 이어 사성<司成>·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병조판서<判書> 등을 역임하였다.광해군<光海君> 때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인조 때에 예문관<藝文館>·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인하여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임하였다. 또한 대명 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 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文運>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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