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시 적성면 산1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연간의 문신인 김덕함(1562∼1636) 선생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낮은 사성<沙城>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우측에 구비<舊碑>와 신비<新碑>가 세워져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상석 앞에는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하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성은 팔작지붕형 가첨석<加첨石>, 비신<碑身>, 비석을 받치는 기대<基臺>, 전체를 받치는 하부 구조인 대좌<臺座>가 설치되어 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을 쓰고, 증손 김유<金濡>가 글을 써서 숙종<肅宗> 12년(1686)에 건립한 것이다. 이 묘역은 두 번의 이장을 거쳐 현종<顯宗> 원년(1660)에 현 위치에 조성되었다. 김덕함은 선조 21년(1588) 진사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에서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암>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선조 27년 군공청<軍功廳>이 세워지자 도청<都廳>이 되어 공을 세웠다. 이후 내·외직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이르렀다.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과 함께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집의<執義>가 되고 참의<參議>를 거쳐 부제학<副提學>·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의 호소사<號召使>, 난이 끝난 뒤 여주목사<牧使>·춘천부사<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인조 14년 청백리에 선정되고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대중교통]
불광동터미널에서 적성행 직행버스를 타고 적성터미널에서 하차
25번버스를 타고 전진휴게소 지나 사기막앞에서 하차
(도보 40여분 소요)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연간의 문신인 김덕함(1562∼1636) 선생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낮은 사성<沙城>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우측에 구비<舊碑>와 신비<新碑>가 세워져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다. 상석 앞에는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하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성은 팔작지붕형 가첨석<加첨石>, 비신<碑身>, 비석을 받치는 기대<基臺>, 전체를 받치는 하부 구조인 대좌<臺座>가 설치되어 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전액<篆額>을 쓰고, 증손 김유<金濡>가 글을 써서 숙종<肅宗> 12년(1686)에 건립한 것이다. 이 묘역은 두 번의 이장을 거쳐 현종<顯宗> 원년(1660)에 현 위치에 조성되었다. 김덕함은 선조 21년(1588) 진사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안에서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암>을 도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선조 27년 군공청<軍功廳>이 세워지자 도청<都廳>이 되어 공을 세웠다. 이후 내·외직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이르렀다.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과 함께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집의<執義>가 되고 참의<參議>를 거쳐 부제학<副提學>·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의 호소사<號召使>, 난이 끝난 뒤 여주목사<牧使>·춘천부사<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인조 14년 청백리에 선정되고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다.
[대중교통]
불광동터미널에서 적성행 직행버스를 타고 적성터미널에서 하차
25번버스를 타고 전진휴게소 지나 사기막앞에서 하차
(도보 40여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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