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5-1
조선 인조<仁祖>∼효종<孝宗> 연간의 문신인 심지원(1593∼1662)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전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후 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를 좌우에 안장한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 전방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바로 앞은 사적 제323호로 지정된 윤관<尹瓘> 장군 묘역을 정비할 때 곡담 후면으로 막아 버려 전방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신도비는 묘역 하단 3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문은 김수항<金壽恒>이 찬<撰>하고, 신익상<申翼相>이 글과 전액<篆額>을 써서 숙종<肅宗> 12년(1686)에 건립하였다. 심지원은 광해군(光海君) 12년(162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족조<族祖>가 대북파<大北派>였으나 대북의 정책에는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 이듬해 검열<檢閱>에 등용된 뒤 정언<正言>·교리<校里>·헌납<獻納>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인조 8년(1630)에는 함경도안찰어사<按察御使>로 파견되어 호인<胡人>들과의 말 무역을 단속하고 육진<六鎭>의 방어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당시 탄핵으로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가 인조 21년 다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등용되고, 인조 26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때에는 병조·이조참판<參判>을 거쳐 형조·이조판서<判書>를 역임하고, 효종 5년(1654)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효종 9년 영의정에 올랐다. 효종 10년에는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효종이 돌아가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맡았다.
[대중교통]
불광동터미널에서 322번(좌석)이나 32번(일반)버스를 타고 윤관장군묘에서 하차
조선 인조<仁祖>∼효종<孝宗> 연간의 문신인 심지원(1593∼1662)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전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후 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를 좌우에 안장한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 전방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바로 앞은 사적 제323호로 지정된 윤관<尹瓘> 장군 묘역을 정비할 때 곡담 후면으로 막아 버려 전방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신도비는 묘역 하단 3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문은 김수항<金壽恒>이 찬<撰>하고, 신익상<申翼相>이 글과 전액<篆額>을 써서 숙종<肅宗> 12년(1686)에 건립하였다. 심지원은 광해군(光海君) 12년(162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족조<族祖>가 대북파<大北派>였으나 대북의 정책에는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 이듬해 검열<檢閱>에 등용된 뒤 정언<正言>·교리<校里>·헌납<獻納>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인조 8년(1630)에는 함경도안찰어사<按察御使>로 파견되어 호인<胡人>들과의 말 무역을 단속하고 육진<六鎭>의 방어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당시 탄핵으로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가 인조 21년 다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등용되고, 인조 26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때에는 병조·이조참판<參判>을 거쳐 형조·이조판서<判書>를 역임하고, 효종 5년(1654)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효종 9년 영의정에 올랐다. 효종 10년에는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효종이 돌아가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맡았다.
[대중교통]
불광동터미널에서 322번(좌석)이나 32번(일반)버스를 타고 윤관장군묘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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