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군포시 산본동 산1152-11
조선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으로 활약한 이기조(1595∼1653)를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이며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을 중심으로 전방에 좌우로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앞에는 박세채<朴世采>가 찬<撰>하여 숙종<肅宗> 31년(1705)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이 묘역은 원래 산본동 산16에 위치하였으나 산본 지역의 택지 개발로 인하여 1992년 현 위치로 이장<移葬>하게 되었다. 이장 직전에 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발굴이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 결과 봉분은 전면과 좌우면이 장대석을 이용한 호석<護石>으로 둘러져 있었고, 봉분 좌측 가장자리 호석 바깥쪽에서 청화백자<靑畵白磁>로 만든 직사각형 판형<板形>의 묘지석<墓誌石> 14매<枚>가 출토되었고, 내부 구조는 회벽<灰壁>을 2칸으로 구축한 다음 그 안에 각각 목관<木棺>을 안치한 회곽묘<灰槨墓>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묘지석의 내용을 통하여 원래의 묘역이 영조<英祖> 4년(1728)에 이장되어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묘역의 시대는 이것을 기준한 것이다. 이기조는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진사로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형조좌랑<刑曹佐郞>에 기용되어 병조참의<兵曹參議>·공주목사<牧使>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어 대사간<大司諫>·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고 인조 2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감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나 김육<金堉>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監司>로 밀려났다가 효종 4년(1653)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
조선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으로 활약한 이기조(1595∼1653)를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이며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을 중심으로 전방에 좌우로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앞에는 박세채<朴世采>가 찬<撰>하여 숙종<肅宗> 31년(1705)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이 묘역은 원래 산본동 산16에 위치하였으나 산본 지역의 택지 개발로 인하여 1992년 현 위치로 이장<移葬>하게 되었다. 이장 직전에 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발굴이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 결과 봉분은 전면과 좌우면이 장대석을 이용한 호석<護石>으로 둘러져 있었고, 봉분 좌측 가장자리 호석 바깥쪽에서 청화백자<靑畵白磁>로 만든 직사각형 판형<板形>의 묘지석<墓誌石> 14매<枚>가 출토되었고, 내부 구조는 회벽<灰壁>을 2칸으로 구축한 다음 그 안에 각각 목관<木棺>을 안치한 회곽묘<灰槨墓>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묘지석의 내용을 통하여 원래의 묘역이 영조<英祖> 4년(1728)에 이장되어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묘역의 시대는 이것을 기준한 것이다. 이기조는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진사로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형조좌랑<刑曹佐郞>에 기용되어 병조참의<兵曹參議>·공주목사<牧使>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어 대사간<大司諫>·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고 인조 2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감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나 김육<金堉>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監司>로 밀려났다가 효종 4년(1653)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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