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주군 중부면 198-1
개원사는 조선 인조<仁祖>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僧徒>들을 총지휘하는 본영 사찰<本營 寺刹>로 창건되었다. 남한산성 내에는 원래 있었던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 외에 7개의 절이 더 창건되었는데 개원사를 본영 사찰로 활용하고 나머지 8사는 각 도의 승병<僧兵>을 주둔하게 하여 개원사는 조선 승병의 총지휘소로 사용되었다. 그 후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의승방번<義僧防番>이 폐지될 때까지 370여년간 수도 한양을 지켜 온 호국사찰로 번창했으며, 전국 사원들의 승풍<僧風>을 규찰하는 규정소<糾正所>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곳에는 인조 15년이래 대장경이 보관되어 왔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인조 15년 대장경을 실은 배가 서호<西湖>에 닿았는데 사람은 없고 그 함위에 '중원개원사간<中原開元寺刊>'이라고 쓰인 책함만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인조는 전국에서 개원사라는 이름의 절을 찾아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유일의 개원사였던 이 절에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란보<金란褓> 열 벌로 싸서 봉안되었던 대장경은 안타깝게도 1970년 화재 발생 때 법당·누각 등의 부속 건물과 함께 전소되었다. 그 후 작은 건물 1동이 겨우 남아 있었으나, 선효화상<禪曉和尙>이 신도들과 함께 10여 년 간에 걸친 원력<願力> 끝에 대각전<大覺殿>·요사<寮舍> 등의 건물을 신축한 후 새롭게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군기고지<軍器庫址>, 누각지<樓閣址>, 종각지<鐘閣址> 등에는 초석<礎石>, 돌계단, 박석<薄石> 등이 남아 있어 옛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짐작케 한다. 또한 이 사찰에는 남한산성 축성과 산성 수호 승군들이 사용했던 유분<鍮盆> 1점과 석장<石杖>·옹기<甕器>·함지 등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개원사는 조선 인조<仁祖>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승도<僧徒>들을 총지휘하는 본영 사찰<本營 寺刹>로 창건되었다. 남한산성 내에는 원래 있었던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 외에 7개의 절이 더 창건되었는데 개원사를 본영 사찰로 활용하고 나머지 8사는 각 도의 승병<僧兵>을 주둔하게 하여 개원사는 조선 승병의 총지휘소로 사용되었다. 그 후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의승방번<義僧防番>이 폐지될 때까지 370여년간 수도 한양을 지켜 온 호국사찰로 번창했으며, 전국 사원들의 승풍<僧風>을 규찰하는 규정소<糾正所>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곳에는 인조 15년이래 대장경이 보관되어 왔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인조 15년 대장경을 실은 배가 서호<西湖>에 닿았는데 사람은 없고 그 함위에 '중원개원사간<中原開元寺刊>'이라고 쓰인 책함만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인조는 전국에서 개원사라는 이름의 절을 찾아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유일의 개원사였던 이 절에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란보<金란褓> 열 벌로 싸서 봉안되었던 대장경은 안타깝게도 1970년 화재 발생 때 법당·누각 등의 부속 건물과 함께 전소되었다. 그 후 작은 건물 1동이 겨우 남아 있었으나, 선효화상<禪曉和尙>이 신도들과 함께 10여 년 간에 걸친 원력<願力> 끝에 대각전<大覺殿>·요사<寮舍> 등의 건물을 신축한 후 새롭게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군기고지<軍器庫址>, 누각지<樓閣址>, 종각지<鐘閣址> 등에는 초석<礎石>, 돌계단, 박석<薄石> 등이 남아 있어 옛 개원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짐작케 한다. 또한 이 사찰에는 남한산성 축성과 산성 수호 승군들이 사용했던 유분<鍮盆> 1점과 석장<石杖>·옹기<甕器>·함지 등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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