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시 모현면 오산리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 활약한 오윤겸(1559∼1636)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쌍분으로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합장묘이다. 묘역은 후손들이 1986년에 새로 단장하면서 봉분에 원형의 호석<護石>을 둘렀다. 쌍분의 중앙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전방의 좌우에는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좌측 봉분의 앞쪽에 묘비가 있는데, 비의 규모는 총 높이가 282㎝로 비교적 대형이며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하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쓴 것으로 인조 25년(1647)에 건립된 것이다. 오윤겸은 선조 15년(158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1617)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150명의 포로를 데려왔는데 이 때부터 일본과의 국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면서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西人>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南人>·북인<北人>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인조 6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노서·소서 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청<經筵廳>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性理學>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 활약한 오윤겸(1559∼1636)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쌍분으로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와의 합장묘이다. 묘역은 후손들이 1986년에 새로 단장하면서 봉분에 원형의 호석<護石>을 둘렀다. 쌍분의 중앙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전방의 좌우에는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좌측 봉분의 앞쪽에 묘비가 있는데, 비의 규모는 총 높이가 282㎝로 비교적 대형이며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하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쓴 것으로 인조 25년(1647)에 건립된 것이다. 오윤겸은 선조 15년(1582)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1617)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150명의 포로를 데려왔는데 이 때부터 일본과의 국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면서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西人>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南人>·북인<北人>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인조 6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노서·소서 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청<經筵廳>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性理學>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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