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1,6,10리 산6
조선 인조<仁祖>·효종<孝宗> 때 활약한 김상헌(1570∼1652)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 앞의 좌우에는 문인석이 1쌍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현종<顯宗> 10년(1669)에 건립된 것이고, 묘역 우측에 그 당시 건립한 또 하나의 비<碑>가 있는 것이 이 묘역의 특징이다. 이 묘갈은 묘비 건립 2년 뒤인 현종 12년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은 전면에 '유명조선국문정공청음선생묘명<有明朝鮮國文正公淸陰先生墓銘>'이라는 비의 제목으로 시작하고 김수증<金壽增>이 쓴 묘명이 있으며, 후면에 송준길<宋浚吉>이 쓴 후서<後序>가 있다. 김상헌은 선조<宣祖> 29년(1596) 정시문과<庭試文科>와 선조 41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각각 급제, 정언<正言>·교리<校里>·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 파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 위주<保合爲主> 정치에 반대, 시비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波>의 영수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척화<斥和>를 주장한 탓에 이듬해 강화가 이루어지자 파직되고, 인조 17년 명을 공격하기 위한 청의 출병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이듬해 청나라에 압송되었다가 6년 후에 풀려나서 귀국하였다. 인조 23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다.
조선 인조<仁祖>·효종<孝宗> 때 활약한 김상헌(1570∼1652)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 앞의 좌우에는 문인석이 1쌍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현종<顯宗> 10년(1669)에 건립된 것이고, 묘역 우측에 그 당시 건립한 또 하나의 비<碑>가 있는 것이 이 묘역의 특징이다. 이 묘갈은 묘비 건립 2년 뒤인 현종 12년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은 전면에 '유명조선국문정공청음선생묘명<有明朝鮮國文正公淸陰先生墓銘>'이라는 비의 제목으로 시작하고 김수증<金壽增>이 쓴 묘명이 있으며, 후면에 송준길<宋浚吉>이 쓴 후서<後序>가 있다. 김상헌은 선조<宣祖> 29년(1596) 정시문과<庭試文科>와 선조 41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각각 급제, 정언<正言>·교리<校里>·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한때 파직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 위주<保合爲主> 정치에 반대, 시비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波>의 영수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척화<斥和>를 주장한 탓에 이듬해 강화가 이루어지자 파직되고, 인조 17년 명을 공격하기 위한 청의 출병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이듬해 청나라에 압송되었다가 6년 후에 풀려나서 귀국하였다. 인조 23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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