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1,6,10리 산6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김상용(1561∼1637)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 앞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 약 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수<이首>·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고 총 높이 359㎝의 거대한 규모이다. 이수의 조각은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으로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아우인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하고 유시정<柳時定>이 글을 썼으며, 김광현<金光鉉>이 전액<篆額>을 써서 인조 25년(1647)에 건립한 것이다. 김상용은 선조 23년(159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난갔다가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선조 31년 승지<承旨>에 발탁되고, 그 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 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면서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병조·예조·이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지켰다. 인조 10년에 우의정으로 발탁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김상용(1561∼1637)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 앞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 약 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수<이首>·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고 총 높이 359㎝의 거대한 규모이다. 이수의 조각은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으로 매우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아우인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하고 유시정<柳時定>이 글을 썼으며, 김광현<金光鉉>이 전액<篆額>을 써서 인조 25년(1647)에 건립한 것이다. 김상용은 선조 23년(159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난갔다가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선조 31년 승지<承旨>에 발탁되고, 그 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 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면서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병조·예조·이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지켰다. 인조 10년에 우의정으로 발탁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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