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산120-1
고려의 충신으로 고려가 멸망한 것을 비관하고 자결한 김자수(생몰년 미상)를 모신 유택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높이 80㎝로 작은 크기이며 고졸<古拙>한 느낌이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의 형태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석양·장명등·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새로 채유후<蔡裕後>가 찬<撰>하여 건립하였다. 김자수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다. 우왕<禑王> 초에 사간원<司諫院>의 정 6품 벼슬인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민수가 전날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서 많은 사졸<士卒>을 죽게 하였다고, 교서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왕에게 직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관찰사<觀察使>·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太宗>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고려의 충신으로 고려가 멸망한 것을 비관하고 자결한 김자수(생몰년 미상)를 모신 유택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높이 80㎝로 작은 크기이며 고졸<古拙>한 느낌이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의 형태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석양·장명등·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새로 채유후<蔡裕後>가 찬<撰>하여 건립하였다. 김자수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다. 우왕<禑王> 초에 사간원<司諫院>의 정 6품 벼슬인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민수가 전날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서 많은 사졸<士卒>을 죽게 하였다고, 교서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왕에게 직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관찰사<觀察使>·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太宗>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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