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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선생묘 - 고려가 멸망한 것을 비관하고 자결한 김자수를 모신 유택

by 넥스루비 2007. 8. 7.
경기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산120-1

고려의 충신으로 고려가 멸망한 것을 비관하고 자결한 김자수(생몰년 미상)를 모신 유택이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높이 80㎝로 작은 크기이며 고졸<古拙>한 느낌이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의 형태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석양·장명등·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새로 채유후<蔡裕後>가 찬<撰>하여 건립하였다. 김자수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다. 우왕<禑王> 초에 사간원<司諫院>의 정 6품 벼슬인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민수가 전날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서 많은 사졸<士卒>을 죽게 하였다고, 교서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왕에게 직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관찰사<觀察使>·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 말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종<太宗>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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