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5-1
각종 사화<士禍> 속에서도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려 애쓴 이준경(1499∼1572)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과의 합장묘이며, 장대석을 이용하여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의 전방에는 장명등이 있고, 장명 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앞의 묘비는 근래에 세운 것인데, 원래의 묘비는 노수신<盧守愼>이 찬<撰>하여 조선 선조<宣祖> 18년(1585)에 건립한 것으로 마모가 심하여 현재는 수원대학교 박물관에 이관되어 있다. 묘소에 있는 비는 원래 묘비의 비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준경은 연산군<燕山君>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중종 26년(15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죄를 받은 선비들의 무죄함을 중종에게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일파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중종 32년 다시 등용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대사헌<大司憲>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명종<明宗> 5년(1550) 영의정 이기<李기>의 모함으로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명종 20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선조<宣祖> 때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보좌하면서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또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억울하게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을 비롯한 인재를 석방하여 등용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각종 사화<士禍> 속에서도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려 애쓴 이준경(1499∼1572)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과의 합장묘이며, 장대석을 이용하여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의 전방에는 장명등이 있고, 장명 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앞의 묘비는 근래에 세운 것인데, 원래의 묘비는 노수신<盧守愼>이 찬<撰>하여 조선 선조<宣祖> 18년(1585)에 건립한 것으로 마모가 심하여 현재는 수원대학교 박물관에 이관되어 있다. 묘소에 있는 비는 원래 묘비의 비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준경은 연산군<燕山君>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중종 26년(15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죄를 받은 선비들의 무죄함을 중종에게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일파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중종 32년 다시 등용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대사헌<大司憲>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명종<明宗> 5년(1550) 영의정 이기<李기>의 모함으로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명종 20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선조<宣祖> 때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보좌하면서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또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억울하게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을 비롯한 인재를 석방하여 등용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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