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창녕읍 28-1
경남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萬玉亭) 공원내에 위치.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하나.
신라가 가야 정벌후 기념으로 세운 것인데 높이 178cm, 폭 175cm, 두께 30.3cm로 화강자연석.
비면의 마멸이 심해 안타깝게도 글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대의 비로서 국내에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비이다. 지금껏 발견된 순수비 5비중 가장 먼저 건립되었고 학술상으로는 물론 문장과 글씨로 미루어 예술사상 손꼽히는 보물이다 (명문이 정확히 기록되어서).
1914년 2월 창녕초등학교 학생이 창녕읍 말흘리 화왕산 기슭에 소풍갔다가 목마산성 서쪽기슭의 밭 속에 있던 것을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교장의 보고에 의하여 동경제대 도리이(鳥居龍藏)가 신라비석임을 확인하고 학계에 보고함으로 알려지게 된다.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면서 비각을 건립했으나 일본식의 비각이었고 6ㆍ25이후 다시 한국식으로 신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비를 순수비(巡狩碑)라고도 하는데 왕이 군신을 거느리고 국내를 순시하여 민심을 살핀 사적을 기록한 비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를 척경비라고 하나 일종의 순수비로 볼 수 있다.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전부 27행. 각 행마다 18∼27자의 비문을 육조체(六朝體) 해서(楷書)로 글을 새겼는데, 글 둘레에는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로 둘러 윤곽을 세겼다.
비문의 전반부는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맨 처음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있기 때문에 561년(진흥왕 22)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와는 달리 비문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명이 보이지 않으나 어가(御駕)를 수행한 신료(臣僚)들의 명단이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비문의 전반부는 판독이 힘들기도 하지만 확인되는 글자와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의 경우를 통해 내용을 유추해 보면 신라 진흥왕이 창녕의 비사벌(比斯伐) 가야를 점령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강토를 개척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이 창녕에 순수하여 내외의 고관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왕으로서의 통치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이 일치협력하여 백성을 잘 이끌라는 유시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비문 첫단은 비 건립년사를 기록하고 다음은 군주의 사적이 10줄과 11줄에 걸쳐 "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어 대신들에게 행정을 위임하였다"고 시작한 데서 비롯하여 상당히 긴 문장으로 연속된 비의 본문을 이루고, 그 이후 11관사명(官寺名) 등을 줄에서 끝까지는 모두 왕을 수행한 신하들을 중앙행정관, 지방군정관, 지방행정관, 시종의 순서로 기록하고 각 신하들은 각기 관직명, 출신지역명, 아명, 관등명의 순서로 40명가량 기록하고 있다.
다른 진흥왕비에 비하여 이 비는 수행한 신하가 가장 많은 것도 특색이다.
비문의 후반부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신라 지방행정조직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즉 신라 중고기(中古期;법흥왕∼진덕여왕)의 관제, 신분제, 사회조직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외에도 '답(沓)'과 같은 우리나라 특유의 한자가 비문에 보이고 있는 점도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족하다.
※ 지금까지 밝혀진 순수비
창녕 진흥왕 순수비(국보 제3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보 제3호) :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높이 151.5cm, 너비 79.5cm, 두께 16.6cm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 함남 함흥군 황초령, 568년에 화강암으로 건립
높이 151.5cm, 너비 46.9cm. 두께 24.5∼48.5cm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 함남 이원군 마운령, 568년에 흑색 화강암으로 건립
높이 165.1cm, 너비 44.2cm, 두께 30.3cm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제198호) : 1978년 1월 단양읍 하방리 뒷산 성재산 적성내에서 단국대학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높이 93cm, 윗너비 107cm,아랫너비 53cm
확실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으나 새겨진 내용으로 추측컨데 545∼550년 사이로 추정하면 단양 적성비의 건립연대가 단연 앞서게 된다.
경남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萬玉亭) 공원내에 위치.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하나.
신라가 가야 정벌후 기념으로 세운 것인데 높이 178cm, 폭 175cm, 두께 30.3cm로 화강자연석.
비면의 마멸이 심해 안타깝게도 글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고대의 비로서 국내에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비이다. 지금껏 발견된 순수비 5비중 가장 먼저 건립되었고 학술상으로는 물론 문장과 글씨로 미루어 예술사상 손꼽히는 보물이다 (명문이 정확히 기록되어서).
1914년 2월 창녕초등학교 학생이 창녕읍 말흘리 화왕산 기슭에 소풍갔다가 목마산성 서쪽기슭의 밭 속에 있던 것을 발견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교장의 보고에 의하여 동경제대 도리이(鳥居龍藏)가 신라비석임을 확인하고 학계에 보고함으로 알려지게 된다.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면서 비각을 건립했으나 일본식의 비각이었고 6ㆍ25이후 다시 한국식으로 신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비를 순수비(巡狩碑)라고도 하는데 왕이 군신을 거느리고 국내를 순시하여 민심을 살핀 사적을 기록한 비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를 척경비라고 하나 일종의 순수비로 볼 수 있다.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전부 27행. 각 행마다 18∼27자의 비문을 육조체(六朝體) 해서(楷書)로 글을 새겼는데, 글 둘레에는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로 둘러 윤곽을 세겼다.
비문의 전반부는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맨 처음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있기 때문에 561년(진흥왕 22)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와는 달리 비문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명이 보이지 않으나 어가(御駕)를 수행한 신료(臣僚)들의 명단이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비문의 전반부는 판독이 힘들기도 하지만 확인되는 글자와 진흥왕의 다른 순수비의 경우를 통해 내용을 유추해 보면 신라 진흥왕이 창녕의 비사벌(比斯伐) 가야를 점령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강토를 개척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이 창녕에 순수하여 내외의 고관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왕으로서의 통치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이 일치협력하여 백성을 잘 이끌라는 유시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비문 첫단은 비 건립년사를 기록하고 다음은 군주의 사적이 10줄과 11줄에 걸쳐 "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어 대신들에게 행정을 위임하였다"고 시작한 데서 비롯하여 상당히 긴 문장으로 연속된 비의 본문을 이루고, 그 이후 11관사명(官寺名) 등을 줄에서 끝까지는 모두 왕을 수행한 신하들을 중앙행정관, 지방군정관, 지방행정관, 시종의 순서로 기록하고 각 신하들은 각기 관직명, 출신지역명, 아명, 관등명의 순서로 40명가량 기록하고 있다.
다른 진흥왕비에 비하여 이 비는 수행한 신하가 가장 많은 것도 특색이다.
비문의 후반부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 신라 지방행정조직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즉 신라 중고기(中古期;법흥왕∼진덕여왕)의 관제, 신분제, 사회조직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외에도 '답(沓)'과 같은 우리나라 특유의 한자가 비문에 보이고 있는 점도 일정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족하다.
※ 지금까지 밝혀진 순수비
창녕 진흥왕 순수비(국보 제3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국보 제3호) :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높이 151.5cm, 너비 79.5cm, 두께 16.6cm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 함남 함흥군 황초령, 568년에 화강암으로 건립
높이 151.5cm, 너비 46.9cm. 두께 24.5∼48.5cm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 함남 이원군 마운령, 568년에 흑색 화강암으로 건립
높이 165.1cm, 너비 44.2cm, 두께 30.3cm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제198호) : 1978년 1월 단양읍 하방리 뒷산 성재산 적성내에서 단국대학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높이 93cm, 윗너비 107cm,아랫너비 53cm
확실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으나 새겨진 내용으로 추측컨데 545∼550년 사이로 추정하면 단양 적성비의 건립연대가 단연 앞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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