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시 대성동 434번지
이 유적은 김해 건설공고와 김해건설운동장 사이에 뻗어 있는 낮은 구릉지대에 있다. 현재 구릉 주변의 경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고 고분은 오래 전부터 도굴, 파괴된 것 같으며, 정상부에 있는 고분은 근래에 도굴되어 곳곳에 도굴구멍이 뚫려 있다. 1991년부터 93년에 걸쳐 경성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였다. 보고자료에 의하면 서기 1세기 전후부터 5세기에 걸쳐서 형성된 지배집단의 묘역에서 지석묘(支石墓)를 비롯하여 土壙墓, 木棺墓, 甕棺墓, 竪穴式石槨墓, 橫口式石室墓 등 가야시대 여러 형식의 분묘가 발굴되었는데, 구릉지대에 4,5세기대의 고분과 구릉 주변의 평지에는 1∼3세기대의 고분이 밀집하여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서 이곳은 삼한시대의 狗邪國 단계에서 金官伽倻 단계에 이르기까지 묘역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유물은 토기류를 비롯하여 工具·武器·馬具 등의 철기류와 碧玉製玉丈 등의 옥류 등이 출토되었다. 3차 발굴에서는 1∼3세기대의 목관묘의 구조와 계통을 확인하게 되었다. 1세기로 추정되는 주변 제 Ⅲ지구 1·2호 목관묘는 남아 있는 목관으로 보아 판재로 조립하였고 기원 전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거창군 다호리 1호 목관묘에서의 통나무 목관과는 그 구조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는 목관이 재래의 통나무 목곽에서 판재목관으로 바뀌는 시기가 기원 1세기경임을 나타내며, 낙랑문화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변 제 1지구에서는 古式의 丹塗磨硏土器를 동반한 석곽구조를 가진 지석묘 1기가 조사되었고 구릉 주변의 지역에서 無文土器片과 半月形石刀 등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주거지역이나 분묘지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유적과 북쪽으로 연결되는 낮은 구릉에 축조된 분묘에서 처음으로 철띠(鐵帶)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김해 건설공고와 김해건설운동장 사이에 뻗어 있는 낮은 구릉지대에 있다. 현재 구릉 주변의 경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고 고분은 오래 전부터 도굴, 파괴된 것 같으며, 정상부에 있는 고분은 근래에 도굴되어 곳곳에 도굴구멍이 뚫려 있다. 1991년부터 93년에 걸쳐 경성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 발굴하였다. 보고자료에 의하면 서기 1세기 전후부터 5세기에 걸쳐서 형성된 지배집단의 묘역에서 지석묘(支石墓)를 비롯하여 土壙墓, 木棺墓, 甕棺墓, 竪穴式石槨墓, 橫口式石室墓 등 가야시대 여러 형식의 분묘가 발굴되었는데, 구릉지대에 4,5세기대의 고분과 구릉 주변의 평지에는 1∼3세기대의 고분이 밀집하여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서 이곳은 삼한시대의 狗邪國 단계에서 金官伽倻 단계에 이르기까지 묘역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유물은 토기류를 비롯하여 工具·武器·馬具 등의 철기류와 碧玉製玉丈 등의 옥류 등이 출토되었다. 3차 발굴에서는 1∼3세기대의 목관묘의 구조와 계통을 확인하게 되었다. 1세기로 추정되는 주변 제 Ⅲ지구 1·2호 목관묘는 남아 있는 목관으로 보아 판재로 조립하였고 기원 전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거창군 다호리 1호 목관묘에서의 통나무 목관과는 그 구조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는 목관이 재래의 통나무 목곽에서 판재목관으로 바뀌는 시기가 기원 1세기경임을 나타내며, 낙랑문화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변 제 1지구에서는 古式의 丹塗磨硏土器를 동반한 석곽구조를 가진 지석묘 1기가 조사되었고 구릉 주변의 지역에서 無文土器片과 半月形石刀 등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주거지역이나 분묘지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유적과 북쪽으로 연결되는 낮은 구릉에 축조된 분묘에서 처음으로 철띠(鐵帶)가 출토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