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369-6번지
고분군은 예안리패총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쪽의 밭에 집중되어 있는데, 수리공사 때에 흙을 가져간 곳이어서 1947년 경까지만 하더라도 여기 저기에 파괴된 石槨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경작지로 변하여 봉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지형은 서북쪽이 까치산과 동쪽의 마산 사이에 동서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매우 낮은 구릉지대이다.
고분군은 예안리패총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쪽의 밭에 집중되어 있는데, 수리공사 때에 흙을 가져간 곳이어서 1947년 경까지만 하더라도 여기 저기에 파괴된 石槨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경작지로 변하여 봉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지형은 서북쪽이 까치산과 동쪽의 마산 사이에 동서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매우 낮은 구릉지대이다.
이 유적은 국립박물관이 1차 발굴한 이후 다시 부산대학교 박물관이 1976년부터 1980년 사이에 4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보고서가 1985년, 92년, 93년에 각각 나왔다.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가야시대의 분묘 뿐만이 아니라 그 하층에는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의 유구들도 있었는데, 가장 나중에 사용한 가야시대에 분묘들이 워낙 조밀하게 중복·축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앞선 시기의 유적성격은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유구는 목곽묘 59기, 석곽묘 93기, 옹관묘 17기, 석실묘 12기 등 총 181기가 조사되었고,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1,100여점, 철기류 660여점, 구슬류 180여점, 耳飾 41짝, 骨鏃 60여점 등 모두 2,000여점이었으며 그 밖에 170여구의 인골이 검출되었다. 분묘는 4세기대에서 6세기대까지에 걸쳐 이루어진 단위 유적으로 가야시대의 다양한 모든 묘제가 중복으로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곽묘→석곽묘→석실묘에로의 묘제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한 인골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형질인류학의 연구자료를 제공한 유적이다. 묘제와 출토유물을 토기를 중심으로 10단계로 나누고 묘제는 목곽 2형식, 석곽 3형식, 석실 1형식으로 분류하여 1단계는 古式 硬質土器단계로, 5∼8단계는 신라·가야토기 단계로 나뉘고 9·10단계는 통일신라시대토기의 단계로 구분하였다. 偏頭가 10구 출토되었기 때문에 4세기 전기의 예안리 사람들에게 편두풍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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