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
이 능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妃陵이라고 전하여 오는 고분으로 龜旨峰의 동북쪽 국도 건너편 구지동 고분군으로부터 서쪽으로 100m의 거리에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許后는 옛 아유타國에서 공주로 16세 때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 7년에 왕비가 되어 189년 3월 1일에 수로왕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수로왕의 두 아들도 許氏의 성을 따르게 하여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전한다.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의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있지 않다. 그 규모는 길이 18m, 폭 6m, 높이 약 5m이며 능 주위에는 얕은 돌담이 방형으로 돌러져 있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중앙에는 상석과 능비가 세워져 있고 [駕洛國首露王妃 晋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두줄로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은 [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능 구역의 입구에는 內三門이 있으며 밖에는 숭보제(崇報齊)와 外三門, 紅 門이 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 졌으며 [金海邑誌]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도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인조 25년(1641)에 다시 수축하면서 현재의 능비와 상석 등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1972년과 1981년에 건물과 능묘 주변을 보수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경내에 [婆娑石塔(파사석탑)]의 파편이라고 하는 것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삼국유사] 권 제 3의 塔像 제4에 보이는 [金官城婆娑石塔]의 내용을 떼어다 붙인 자연석의 파편으로 보인다. 이 능은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빈약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 왔으므로 이 것이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한다면 그 내부구조는 토광묘 또는 수혈식 석관묘일 가능성이 높다.
이 능은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妃陵이라고 전하여 오는 고분으로 龜旨峰의 동북쪽 국도 건너편 구지동 고분군으로부터 서쪽으로 100m의 거리에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許后는 옛 아유타國에서 공주로 16세 때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 7년에 왕비가 되어 189년 3월 1일에 수로왕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수로왕의 두 아들도 許氏의 성을 따르게 하여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전한다.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의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있지 않다. 그 규모는 길이 18m, 폭 6m, 높이 약 5m이며 능 주위에는 얕은 돌담이 방형으로 돌러져 있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중앙에는 상석과 능비가 세워져 있고 [駕洛國首露王妃 晋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두줄로 새겨져 있는데 이 비문은 [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능 구역의 입구에는 內三門이 있으며 밖에는 숭보제(崇報齊)와 外三門, 紅 門이 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 졌으며 [金海邑誌]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도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인조 25년(1641)에 다시 수축하면서 현재의 능비와 상석 등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1972년과 1981년에 건물과 능묘 주변을 보수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경내에 [婆娑石塔(파사석탑)]의 파편이라고 하는 것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삼국유사] 권 제 3의 塔像 제4에 보이는 [金官城婆娑石塔]의 내용을 떼어다 붙인 자연석의 파편으로 보인다. 이 능은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빈약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 왔으므로 이 것이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한다면 그 내부구조는 토광묘 또는 수혈식 석관묘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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