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번지
이 능은 오래 전부터 가락국의 시조 수로의 능으로 전해져 왔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陵墓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였지만 조선시대 초기의 능묘가 황폐되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세종 21년(1439)에 당시 경상도관찰사인 李宣의 건의에 따라 능묘 30步 주변을 정화 보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 28년(1446)에는 다시 수로왕릉과 허왕후능에 대해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100보에 포석을 세워 수호구역으로 확대하여 왕능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영남관찰사 許粹가 상석,석단, 능표 등의 석물을 시설하여 수축하면서 부터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굴을 당하기도 하였다. 인조 25년(1647)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2년(1884)에는 숭선전(崇善殿)이란 호를 내린 침묘(寢廟)를 개축하였다. 이때 安香閣과 神道碑閣, 石獸도 설치하였다. 봉분은 원형 봉토분으로 규모는 길이 22m, 폭 21m, 높이 약 5m이며 봉분의 주변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다. 봉분앞에는 능비, 床石, 長明燈, 望柱가 있고 숭선전을 비롯하여 駕落樓, 紅 門, 崇化門 등의 여러 건물과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이는 수로왕의 장례기사(葬禮記事)에는 "드디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陵墓를 지었다. 높이 一丈이고 주위 삼백보로 그곳에 장사를 지내고 首露王廟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봉분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듯하다. 이 능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 능이 실제로 가락국의 수로왕릉이라고 한다면 그 상한 AD1세기에서 3세기 사이가 되며 이 시기는 문화단계로 보아 본격적인 고총 고분 이전의 단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생각한다면 토광묘일 가능성도 있고 芝峰類說에 보이는 왕릉이 도굴기사로 보면 규모가 큰 석실묘일 가능성도 있다.
이 능은 오래 전부터 가락국의 시조 수로의 능으로 전해져 왔다. 고려 문종대까지는 陵墓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였지만 조선시대 초기의 능묘가 황폐되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세종 21년(1439)에 당시 경상도관찰사인 李宣의 건의에 따라 능묘 30步 주변을 정화 보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 28년(1446)에는 다시 수로왕릉과 허왕후능에 대해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100보에 포석을 세워 수호구역으로 확대하여 왕능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영남관찰사 許粹가 상석,석단, 능표 등의 석물을 시설하여 수축하면서 부터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굴을 당하기도 하였다. 인조 25년(1647)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2년(1884)에는 숭선전(崇善殿)이란 호를 내린 침묘(寢廟)를 개축하였다. 이때 安香閣과 神道碑閣, 石獸도 설치하였다. 봉분은 원형 봉토분으로 규모는 길이 22m, 폭 21m, 높이 약 5m이며 봉분의 주변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다. 봉분앞에는 능비, 床石, 長明燈, 望柱가 있고 숭선전을 비롯하여 駕落樓, 紅 門, 崇化門 등의 여러 건물과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이는 수로왕의 장례기사(葬禮記事)에는 "드디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陵墓를 지었다. 높이 一丈이고 주위 삼백보로 그곳에 장사를 지내고 首露王廟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봉분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듯하다. 이 능의 내부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 능이 실제로 가락국의 수로왕릉이라고 한다면 그 상한 AD1세기에서 3세기 사이가 되며 이 시기는 문화단계로 보아 본격적인 고총 고분 이전의 단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생각한다면 토광묘일 가능성도 있고 芝峰類說에 보이는 왕릉이 도굴기사로 보면 규모가 큰 석실묘일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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