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천북면 629-1
운암공<耘庵公> 부조묘<不조廟>는 운암 최봉천<耘庵 崔奉天>(1564∼1597)을 모신 묘우<廟宇>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 홑처마, 맞배지붕의 형식을 갖춘 1821년에 세원진 건물<建物>이다. 운암공은 자<字>는 국보<國輔>,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조선초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재종숙<再從叔>이다. 선조<宣祖> 21년 25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여천, 울산, 경주성 수복작전에 많은 공을 세워 종 4품 종 3품에 제수되었다가 동왕<同王> 29년에 경상좌도수군우후<慶尙左道水軍虞候>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생하여 동왕 30년 영천<永川>의 창암에서 전사<戰死>하였다. 선조 38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책정때 일등<一等>에 책록되었고, 18세기이래 향중<鄕中> 사림<士林>의 상언<上言>, 상류<上流>의 진정에 의해 1821년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兵曹>참판<參判>에 추증되고 중종때 부조묘로 받들게 되었다. 부조묘<不조廟>는 천북면 성지리에 소재하고 있고 주상<柱上>에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장식하였으며 창방위에 소누<小累>를 끼웠다. 가구<架構>는 3량가인데 대량<大樑>위에 원형판대공<圓形版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설을 받게 하였다. 원래 단청을 시채<施彩>하였던 흔적이 있으며, 외부는 거의 벗겨진 상태이며 내부는 현재 조악한 단청이 되어진 상태이다.
운암공<耘庵公> 부조묘<不조廟>는 운암 최봉천<耘庵 崔奉天>(1564∼1597)을 모신 묘우<廟宇>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 홑처마, 맞배지붕의 형식을 갖춘 1821년에 세원진 건물<建物>이다. 운암공은 자<字>는 국보<國輔>,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조선초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재종숙<再從叔>이다. 선조<宣祖> 21년 25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여천, 울산, 경주성 수복작전에 많은 공을 세워 종 4품 종 3품에 제수되었다가 동왕<同王> 29년에 경상좌도수군우후<慶尙左道水軍虞候>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생하여 동왕 30년 영천<永川>의 창암에서 전사<戰死>하였다. 선조 38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책정때 일등<一等>에 책록되었고, 18세기이래 향중<鄕中> 사림<士林>의 상언<上言>, 상류<上流>의 진정에 의해 1821년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兵曹>참판<參判>에 추증되고 중종때 부조묘로 받들게 되었다. 부조묘<不조廟>는 천북면 성지리에 소재하고 있고 주상<柱上>에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장식하였으며 창방위에 소누<小累>를 끼웠다. 가구<架構>는 3량가인데 대량<大樑>위에 원형판대공<圓形版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설을 받게 하였다. 원래 단청을 시채<施彩>하였던 흔적이 있으며, 외부는 거의 벗겨진 상태이며 내부는 현재 조악한 단청이 되어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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