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말목장터에서 2km 쯤 창동리(滄東里)쪽으로 가다보면 전봉준이 고부봉기때까지 살았다는 옛집이 있는 조소마을로 들어가는 표시판을 만난다. 원래는 담안 마을이라고 불렀다는 조소(鳥巢) 마을은 새집처럼 오목하게 들어 앉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894년 고부농민 봉기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다시 보수하여 사적으로 지정하였는데 1974년에 이 집을 해체, 보수 할 때
戊寅 二月十六日
1878년 2월 16일
이라 적힌 상량문이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집은 완전히 불타지 않고 일부가 남아 있었던 모양으로 전봉준이 23살 때 지은 것으로 확실시 되고 있다.
지금의 모습은 원래 있던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오막살이에서 훨씬 번듯하게 복원해 두었다.
남향으로 터를 잡아 동쪽으로 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이 나란히 달린 일자의 4칸 집으로 대문 동쪽에는 재칸을 겸한 변소 한 칸이 별동(別棟)으로 세워져 있다.
집 둘레에는 돌담을 쌓고 담위에는 짚으로 이엉을 엮어 얹었다. 1974년 해체 수리 당시 상량문에 "무인(戊寅) 2월 26일" 이라는 연대가 발견되어 고종 15년 (1878)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말목장터에서 2km 쯤 창동리(滄東里)쪽으로 가다보면 전봉준이 고부봉기때까지 살았다는 옛집이 있는 조소마을로 들어가는 표시판을 만난다. 원래는 담안 마을이라고 불렀다는 조소(鳥巢) 마을은 새집처럼 오목하게 들어 앉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894년 고부농민 봉기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다시 보수하여 사적으로 지정하였는데 1974년에 이 집을 해체, 보수 할 때
戊寅 二月十六日
1878년 2월 16일
이라 적힌 상량문이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집은 완전히 불타지 않고 일부가 남아 있었던 모양으로 전봉준이 23살 때 지은 것으로 확실시 되고 있다.
지금의 모습은 원래 있던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오막살이에서 훨씬 번듯하게 복원해 두었다.
남향으로 터를 잡아 동쪽으로 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이 나란히 달린 일자의 4칸 집으로 대문 동쪽에는 재칸을 겸한 변소 한 칸이 별동(別棟)으로 세워져 있다.
집 둘레에는 돌담을 쌓고 담위에는 짚으로 이엉을 엮어 얹었다. 1974년 해체 수리 당시 상량문에 "무인(戊寅) 2월 26일" 이라는 연대가 발견되어 고종 15년 (1878)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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